*170926 13시 일부 내용 수정 보완
원래 이 글의 제목은 "<호라이즌 제로 던>은 페미니스트 게임이고 페미니즘은 재밌습니다."였다. 메인 글자수 관계로+좀 더 내용과 연관된 제목을 써야할 것 같아서 바꿈. <제로 던>이 페미니스트 게임이라고? or 페미니스트 게임인 건 알겠는데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무슨 관련이지? = 계속 읽으시면 됩니다
몇주 전 <호라이즌 제로 던 Horizon Zero Dawn>을 눈물콧물 흘리면서 플레이했다. 너무너무 재밌는 액션 게임일 뿐 아니라 단연코 최고의 페미니스트 게임이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다. 이 게임이 페미니즘 사상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만들어진건 게임을 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에일로이-가이아-엘리자베트 소벡의 관계가 노라의 가모장제도를 통해 이어지는 것도 그렇고, 메인 스트림과 사이드 퀘스트의 주요 역할은 비백인 여성에게 주로 분배되어 있다는 점은 낫 놓고 기역자만 알면 다 알 수 있을 정도인 것 같다. 그런데도 노컷운동 열렬히 참여하던 모 사이트들이나 외쿡이나 페미나치 딱지를 안 붙이는걸 보면 갓겜 앞에 페미니즘 딱지 안 붙이기 운동이라도 전개하나 싶다. 어쨌든.
<제로 던>은 페미니즘 사상을 서사에 사용할 뿐 아니라, 메리 셸리의 <마지막 인간>의 서문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산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가 19세기 여성 작가들을 분석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이 글의 목적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직간접적으로 인용하여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겪었던 억압,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창조성을 되찾기 극복하기 위해 사용했던 알레고리(<마지막 인간>)를 제시하고, <호라이즌 제로 던>에서 이 서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 글의 메인이 되는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로 유명한 작가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관점에서 메리 셸리를 언급하려면 먼저 그녀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직 페미니스트라는 말조차 없던 시기 초기 여권운동가로 꼽히는 그녀는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장 자크 루소의 여성혐오적인 사상을 조목조목 깐 것으로 유명해졌고, 그 외에도 많은 저서를 남겨서 "페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그녀의 저서를 읽어보면 아주 온건하고 당연한 비판에 불과하며 루소의 주장이 어떻게 수용될수 있었는지 어이가 없을 정도인데, 그녀가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인용하는 <에밀>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여성의 교육은 언제나 남성들과 관련되어야 한다. 우리 남성들을 기쁘게 하고 우리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 우리의 사랑과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되는 것, 우리가 어릴 때는 우리를 교육하고, 우리가 자라는 동안은 우리를 돌보고,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충고해주고, 우리의 인생을 안락하고 기분 좋게 하는 것, 이것들은 언제나 여성의 의무이고, 그들이 어릴 때부터 받아야 하는 교육의 내용이다."
"여성이 한 순간도 독립되어 있다고 스스로 느껴서는 안 되며, 남성이 쉬고자 할 때는 언제나 보다 유혹적인 욕망의 대상이자 그의 보다 달콤한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여성이, 요염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지금과는 매우 다르게, 당시에는 이런 주장에 입각한 '조신한' 여성 교육이 안팎으로 이루어지면서도 여성은 남성의 보조 역할밖에 못하기 때문에 열등하다는 주장이 동시에 먹혔나 보다. 울스턴크래프트 자신의 아버지만 해도 알콜중독자에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려놓고 아내를 때렸다(그가 아내를 때리는 몽둥이가 엄지손가락 굵기보다 가늘어야 한다는 당대의 법을 따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행히 울스턴크래프트는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스스로 교양과 이성을 갈고 닦을 수 있었고, 무사히 성장해서 여성적 저열함은 천성이 아니라 교육에 의해 체계적으로 유발됐다고 반박할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여성은 사교계에 데뷔하는 10대 후반까지 매력을 갈고 닦아 좋은 혼사를 성사시키는 것이 권장됐다. 그리고 그녀의 '순수한' 매력은 권장되다가도 때와 장소에 따라 저열한 멍청함으로 폄하당했으며, 여성의 천성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런 이중잣대를 혹독하게 비판했으며 당대의 결혼 풍습을 "합법적인 매매춘"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날카로운 비판에 비해 그녀의 결론은 믿을 수 없이 온건하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좋은 어머니, 아내,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동등한 권리와 교육이 이뤄져야 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여성이 이성적 존재로서 같이 교육되는 평등한 존재가 되어야만 여성과 남성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가정, 사회, 나아가 인류 전체가 도덕적이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는 말이지만, 그래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 라고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되긴 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두번의 공개적인 연애(한 명은 유부남이어서 더 유명세를 탔고, 다른 한명과는 결혼 신고 없이 아이를 낳았다) 끝에 자유주의 철학자 윌리엄 비시 고드윈과 만난다. 결혼 폐지론자 고드윈과 결혼을 옹호했지만 유연한 사고를 했던 울스턴크래프트는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 합의 하에 결혼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그 유명한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출산 후 산욕열로 사망하지만 모녀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메리는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학술지식을 습득하며 자라났지만, 윌리엄은 메리가 4세일 때 재혼했고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녀와 멀리 떨어져서 지내서 메리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15세가 된 메리는 아버지의 제자 중 하나였던 퍼시 비시 셸리와 열애 끝에 프랑스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이 때 퍼시는 유부남이었고, 이들은 퍼시의 부인이 사망한 뒤 결결혼했다. 셸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평생 자유주의자로 살면서도 지속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후원했다. 후에 페미니즘과 연관성을 질문받았을때도 부정했다고 어디서 읽었었는데 출처가 기억이 안나 검색해 보았더니 이런 인용구도 있다. "나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자기 자신보다 우월해지길 바란다."
그녀가 작고한 남편 퍼시 셸리를 기리기 위해 쓴 <마지막 인간 The Last Man>의 작가 서문에서 셸리는 자신과 퍼시가 '쿠마엔 시빌의 어둠의 동굴'이라는 곳에 갔던 이야기를 소설 형태로 쓰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제로 던>의 소설판처럼 읽힌다. 둘 다 동굴이 주요한 장소로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자궁과 무의식의 알레고리인 동굴은 남성 세계에서는 무지(플라톤), 퇴행(프로이트)로 읽혔지만, 여기에서는 근원과 창조성을 상징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든 잎들, 나무껍질, 그리고 다른 것들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글들이 여러 가지 언어로 표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내 친구가 알 수 없는 언어였고 (...) 어떤 것은 (...) 현대의 사투리로 쓰여 있었다. (...) 우리는 희미한 불빛으로 겨우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것들은 예언과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자세한 관계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였다. 이름들과 (...) 가끔은 환희와 비탄의 외침도 그 얇은 잎에 적힌 글귀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 둘 중 한 명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글자가 적힌 잎들을 급히 긁어모았다. 그리고 어두운, 하늘로 열려 있는 동굴에 작별을 고했다. (...) 그 후 (...) 이 신성한 유물을 해독하는 데 몰두했다. (...) 나는 그 부서질 듯한 시빌의 잎들에서 내가 최근에 발견한 것을 대중에게 제시했다. 그것은 흩어져 있고 연결되어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일관성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쿠마엔 처녀가 하늘로부터 받은 신적인 직관에 의거하고 있다.
ㅡ메리 셸리, <마지막 인간 The Last Man>의 서문(산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재인용)
고대의 원시 여신들은 남성 신들이 등장하면서 격하되어 주변적인 역할에 머무르게 되었다. 역사는 남성의 이야기his-story고 어머니들은 족보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19세기에 자아를 찾으려 했던 여성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쓰고 있듯이, 여성을 배제하고 있는 가부장 남성 문화에서 "여성 작가에게 가부장적 문화는 빈번하게 이상한 의식을 행하고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것처럼"보였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나 셸리가 다시 쓴 동굴 우화는 남성 언어와 남성 세계에서 자신을 찾아내고 창조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쉽지 않다. 셸리의 우화에서 셸리와 퍼시는 원주민 안내자에게 잘못 안내되어, 안내자 없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잘못된 방향으로"가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가 우연히 진짜 동굴과 마주친다.
여성 존재와 언어는 시빌의 잎이나 유적과 마찬가지로 흩어져 파편화되어 있다. 오히려 먼저 시빌의 동굴을 알아보고 잎들에 쓰여있는 어려운 언어도 쉽게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은 남성, 여기서는 퍼시다. 하지만 남성의 역할은 안내자에 그친다. 셸리는 거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만이 "신적인 직관"을 사용하여 시빌의 잎에 흩어진 진실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제로 던>에서 에일로이의 여정도 동일한 구조를 따라간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동굴에서 발견된 에일로이는 근본없는 아이로 낙인찍혀 소외당하던 중, '우연히' 유적에 떨어진다. 여정의 초반 에일로이는 그저 노라 부족에 소속되길 원했고 유적을 다시 찾게 된 이유도 사일렌스의 유도였지만,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자신만이 찾을 수 있는 자신의 근원을 찾기 위해 유적에 뛰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신화 속 최초의 예언가이자 모든 여성 예술가들의 어머니를 발견하고 스스로 그녀의 딸이자 어머니가 된다. 그녀가 발견하는 여신이 가이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여신의 격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케이스 중 하나로 꼽히는데, 천지창조의 어머니 가이아는 이후 감쪽같이 사라지더니 주신 제우스와 그의 형제 포세이돈, 하데스가 등장한 후에서야 데메테르 여신으로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이아의 강력한 힘은 그녀가 하데스에게 납치된 딸을 다시 찾는 이야기에서 여전히 엿보이는데, 데메테르의 슬픔은 만물을 시들게 해서 제우스를 형제의 뜻에 반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이미 죽은 딸을 지상에 부활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항 역시 강력해서, 하데스의 꾐에 넘어가 석류를 먹은 페르세포네는 1년의 3분의 2는 데메테르와, 3분의 1은 하데스와 보내게 된다.
죽음과 삶 사이에 끼인 딸 페르세포네, 울스턴크래프트와 보부와르가 표현했듯 인간과 인간 아님 사이에 끼인 여성, 셸리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인간과 괴물 사이에 끼인 피조물의 위기는 에일로이의 서사를 통해 다시 반복된다. 그녀는 인간인가? 여러 여성들처럼, 에일로이도 마침내 스스로 답을 내린다.
스크린샷은 제로 던 위키의 "가이아 프라임"항목
시빌은 "어두운 하늘로 열려 있는 동굴"에서 하늘의 빛이 들어오는 "돔 모양의 둥근 지붕에 있는 틈새"를 통해 "신적인 직관"을 받았고, "도드라진 돌 좌석"에서 예술을 잉태하여 그것을 바깥의 푸른 세계에서 온 나뭇잎과 껍질에 새겨 넣었다고 묘사된다. 그리고 "여성이 동굴로 들어가 자신의 힘 뿐 아니라 그 힘을 생기게 했을 전통의 흩어진 잎들을 발견"할 때, 시빌의 시들이 너무나 격렬하고 "시적인 광시곡"이 너무 진실해서 셸리는 해독하는 과정이 "세상(한때 다정했던 그 얼굴은 나를 피해 상상력과 힘으로 빛나는 사람을 향했다.) 밖으로 끌려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외친다.
셸리의 해석은 탄생이다. 시빌의 잎을 해독하고 여신의 예술적/성적 에너지를 찾아내는 것은 곧 예언가의 딸로 은유된 자기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이다. "그것이 모호하고 혼란스러울지라도 시빌의 나뭇잎 번역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그것을 해독한 나의 덕이라고 가끔 나는 생각했다."고 쓴다. 반대로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셸리는 자신의 창조적인 힘을 발견함으로써 그 힘의 원천이 되었을 과거의 힘을 새롭게 만들었다. 동굴을 알아보지 못하던 여성은, 잊혀지고 단절되고 파편화된 채로 남은 유적을 찾아 해석하면서 과거 어머니들의 전통과 연결된다.
여기서 우리는 <제로 던>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볼 수 있다. 에일로이는 인간인가? 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로스트가 키워 에일로이로 자랐으므로 인간이기도 하고, AI가 재료를 갖고 목적에 따라 만들었으므로 기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에일로이가 최초로 던졌던 질문(나에게 어머니가 있는가?)를 통해 스스로 깨닫듯이, 어머니 없는 추방자/여신이 선택한 자는 둘 다 그녀가 아니다. 하데스가 건넨 석류는 먹느냐/먹지 않느냐의 선택으로 페르세포네를 궁지에 몬다. 이분법으로 강요된 선택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에일로이는 애초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탐색하고 해석해야 했을 뿐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전통과 자기 자신을 되찾고 현재와 과거간 계속되어온 연대를 복구하는 것이 여성의 영웅담이다.
여기까지만 봐도 <제로 던>은 여성 영웅담일 뿐 아니라 세계관에서 적극적으로 페미니즘 영웅 서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이 게임은 한발 더 나가서 여성 서사를 '사소한'것으로 보는 남성중심주의적 시각에 복수까지 한다. 에일로이가 자신의 근원을 찾는 과정의 조력자는 (침묵Silence과 아주 조금 다른) 사일렌스Sylens인데, 그는 끊임없이 속삭이는 존재이면서 그들이 같은 목적으로 일하는 동업관계일 뿐이라고 선을 긋고 때로 세계의 진실이 걸려있는 마당에 "그렇게 사소한 부분밖에 궁금하지 않다니 놀랍다"는 식으로 에일로이를 비꼰다.
그런데 사실 에일로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내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세계의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었다. 하데스를 멈추기 위한 가이아의 계획은 에일로이가 "어머니가 없고, 기계가 생산한 도구고, 파괴와 불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가정 하에 성립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일렌스는 그의 애착관계에 전혀 이입하지 않는 성격을 통해 결정적인 순간 에일로이를 돕는다. '어머니가 없다'는 말이 가장 심한 욕으로 통용되는 노라 부족에서 자란 에일로이가 진실을 발견하고 절망할 때, 방금 어머니가 둘이나 있다는걸 알아냈는데 무슨 소리냐고 지적한 것. 무감정한 사일렌스에게 그 발언은 객관적 사실의 환기일 뿐이지만, 에일로이는 그 사실을 그녀의 용기로 삼는다. 사일렌스의 동기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에일로이의 여정이 사일렌스의 의도를 벗어나는 건 여기서부터이다.
여성 예술가가 출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어머니 여신이며 자신의 어머니 땅이다. 이 동굴 우화에서 그것은 갈기갈기 찢기는 남성 신인 오시리스Osiris가 아니라, 절단되고 파괴되는 그의 누이인 이시스Isis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곤경을 겪는 남성 시인 오르페우스가 아니라 지하 세계의 미로 같은 동굴에 버려진 채 발견되는, 오르페우스가 잃어버린 신부 유리디체다. 또는 요점을 달리 말해 본다면, 이 우화는 오시리스를 찾고 있는 전통적인 이시스의 모습이(시인인 H.D.가 알고 있었듯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찾고 있는 이시스의 모습이며, 배반당한 유리디체는 사실 (버지니아 울프의 "주디스 셰익스피어"처럼) 자신의 "무덤 동굴"이라는 감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시인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시스와 유리디체를 재구축하면서 여성 예술가는 자신의 문학적 유산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즉 가라앉은 대륙을 재정의하고 되찾는 것이다. 한때는 완벽해 보였던 이 대륙의 모든 것이 지금은 "이상하고" 파편적이며 불완전하게 보인다. 여성 예술가는 수평선 위의 모든 이상한 모습들(역사가들이 "이상한 변종들"이라고 불렀던 소설가들, 비평가들이 "여류 시인"이라고 부른 시인들, 가부장적 시인들이 "무성"의, 괴물 같고 기이하다고 본 혁명적인 예술가들을)포함하고 설명했다. 그들이 속해 왔던 공동체가 그러한 모습들을 기억하여 인물들은 그 완전한 권위를 획득했으며, 그들의 비전은 시빌의 것만큼이나 강력한 계획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ㅡ산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다락방의 미친 여자>
<제로 던> 본편 에일로이와 <프랑켄슈타인>을 썼을때 메리 셸리는 둘 다 성인기에 접어드는 18세였다. 프로젝트 제로-던을 계획하고 실행시켜 현 인류를 의도적으로 멸망시켰던 엘리자베트 소벡과 평생 불명예와 비난을 지고 살았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들은 동굴 안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에게만 허락된 진실을 찾는다. 침묵에 갇였던 딸들이 자아 창조의 우화를 쓸 때, 가부장 남성 신화-하데스에 의해 파괴되고 잊혀져졌던 고대 여신 시빌-가이아도 복권된다.
물론 페미니스트로서 페미니즘적 쾌감을 느꼈기 때문에 이 게임을 미친듯이 사랑하게 되었지만(<위쳐 3>을 시작했는데 재밌다는건 알겠지만 뽕이 안 차고있다...), 이 게임의 스토리가 '보편적으로'감동을 주고 있다는 데서는 희망을 느낀다. <제로 던>의 이야기가 보편 인간의 생명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듯, 페미니즘도 남성 배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라이즌 제로 던>은 (아마 이 글을 읽고있을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페미니스트 게임이고 페미니즘은 재밌습니다.
또 왜냐고? 또 다른 근거가 있다. 갓-HBO의 갓-명작이자 이미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웨스트월드Westworld>의 서사도 정확히 똑같은 구조일 뿐 아니라 남성 중심적 서술과 남성 폭력에 대한 오래된 페미니즘 비판을 내용에 쓰고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들이 하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었다. 게다가 같은 내용으로 천재들이 다 해먹은지 오래다. 그러니까 가장 쉽게 신선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은 여자들이 말하게 두는 것이라고, 두 작품에 쏟아진 호평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 여자들이 말하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너무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