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소개", "가장 좋아하는"의 키워드로 SF&오컬트 스터디에 기고한 글입니다
「나도 우연히 발견했어. 내 머릿속 목소리의 원인이 뭔지 알아내려고 여기로 조사를 하러 왔었거든.」 C.B.가 브리디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흔히 책이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들 하잖아. 확실히 맞는 말이야.」 ‘피난’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브리디는 극장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이래로 공포에 질려 쿵쾅대던 심장이 처음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널 여기로 데리고 온 거야.」 C.B.가 말했다. 「우리가 네 방어벽을 세우는 동안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목소리들을 차단해줄 거야.」 「책을 읽는 사람들이 방어벽이라며?」 「방어벽 중에 하나지. 다행히 거의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는 방어벽이야. 낮이든 밤이든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시간은 거의 없거든. 그러니까 목소리가 너를 압도하기 시작하면 여기나 공공 도서관, 서점, 스타벅스로 가면 돼. 그곳들이 닫히면, 너 스스로 책을 읽어도 돼.」 「하지만 네가 오디오북은 소용없다고 했었잖아.」 「그렇지, 그건 소용없어. 목소리를 차단하는 건 소리가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들의 시냅스 패턴이야. 그러니까 너 스스로 책을 읽거나, 읽고 있는 실제 사람의 소리를 들어야 해. 되도록 고상하고 길고 단조로운 문장이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이 좋아. 이런 거 말이야.」 C.B.가 눈앞에 들고 있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긴장되는 일은, 직관, 감각, 기억, 유추, 증거, 개연성, 귀납적 추정 등 논리학자들의 사용하는 온갖 종류의 증거가 모두 하나가 되어 전적으로 혼자일 뿐이라고 의식을 설득하고 있는데, 바로 그때 어떤 수수께끼 같은 동반자를 찾아내게 될 때이다.」 —코니 윌리스, <크로스토크>
정말 많은 고민을 했는데요2 세상에 좋아하는 sf와 오컬트는 많고, 오늘은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고 친구의 로맨스 정곡이 뭐였는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드라마ver 인표은영이 너무 정곡이라 미칠 것 같았다고) 저도 살면서 가장 로맨틱하게 느꼈던 SF에 대해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로맨스 팡인이고 앞으로도 로맨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쓸 것 같기도 해서 저에 대한 적절한 소개가 될 것 같아요.
<크로스토크>의 주인공 브리디는 참견쟁이 가족, 매일 리필되는 업무메일, 눈치없이 구는 직장 동료 등에 염증이 나있는 평범한 IT회사 직장인입니다. 그런 주제에 용맹하게도 연인과 정서적 텔레파시 수준의 연대를 하고자 최신 유행하는 EED라는 뇌수술을 받죠. 그런데 수술을 끝내니 웬걸, 부작용으로 갑자기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미친듯이 쏟아져 들어와서 일상 생활이 불가능해진 것도 모자라.... 텔레파시를 걸어 이 상황을 도와주기 시작한....음습한 찐따 직장동료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데?
전형적인 페이지터너 로맨스입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한번 정도 큰 갈등을 겪고 서로를 선택하는 얘기 말고 다른 걸 기대하나요? 이건 로맨틱 코미디를 백 편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에요. <여왕마저도>, <둠스데이북> 등의 코니 윌리스 작이라 일단 입담이 좋고요. 예상을 벗어난 전개는 하나도 없는데 요절복통 깔깔대면서 900페이지를 달릴 수 있어요(출판사 리뷰에서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같다고 표현했는데 저는 <오만과 편견>이 생각났어요).
단순하고 정형적이라는 건 그만큼 함의를 풍부하게 담을 수 있다는 뜻도 되잖아요. <크로스토크>에서 뇌수술을 받고 주인공 브리디에게 쏟아지는 생각들은 말그대로 너무 많은 소통, 너무 많은 정보, 세상의 외압, 성장통, 다른 사회에 적응하기까지의 스트레스로 표현될 수 있지만... 한마디로 퉁 치자면 하루아침에 너무 많은 민감성을 가지게 된 인간이랄까요.
그리고 다른 주인공 C.B.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천부적인 텔레파시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에 이 민감성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C.B.는 브리디에게 생각의 홍수 속에서 균형을 잡고 자신을 지키는 법을 가르쳐주죠.
가장 메인이 되는 방법은 첫 문단에 인용하고 있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책을 읽는 데 집중한 사람들의 생각을 asmr삼아 듣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새벽 3시까지 깨어있는 습관도 도움이 된다고 하죠. '불면증 환자들이 다시 잠들기 위해 책을 읽거나 양을 세거나 TV에 나오는 옛날 영화를 보는 시간'이라 다른 사람들과 거의 비슷해질 수 있는 시간이라면서요. 그래서 그들은 같이 책을 읽고 새벽까지 밤을 새우며 끊임없이 대화해요.
그러면서 책을 읽고 새벽을 새우며 지금까지 버텨온 또 다른 과민한 인간, 독자를 위로하죠. 사람들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분발한 점을 알아주면서요.
SF나 오컬트, 넓게 환상문학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상상력을 지름길 삼아 주제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일 거에요.
저는 adhd가 있고 프라이버시라는 단어가 아예 없는 k-가정에서 자라서, 이 시끄럽고 과민한 소설을 거의 현실묘사에 가까운 감각으로 읽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실 지도 궁금하네요!
괴담 이야기도 조금 하자면 전 사실 겁나 쫄보라 괴담을 잘 못 읽어요. 지금도 K님이 추천해주신 고베시 스레 읽고 무서워서 화장실 못 가고 있음. 하지만 언제나 불가해한 것, 경계가 무너지고 낯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끌림은 가지고 있는데 과학이라는 일종의 쿠션을 깔아야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서던 리치>, <프로메테우스>가 제가 볼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뜻.
그리고 추천 단편으로는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질러야 한다> 를 놓고 갑니다(클릭해서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