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안쓰면 까먹을 것 같아서 쓰는 NT라이브 <리어 왕>. 목요일을 금요일로 착각하고 택시타고 갔다가 아니라서 산으로 가버린(리터럴리..) 문제의 그 극이다. 그 다음 날에는 병원에 갔다가 예상시간이 한시간 반이 걸리길래 에이 무슨 한시간 반이야 에바네 ㅎㅎ 했다가 택시를 타고서야 1시간 20분만에 도착함.. 덕분에 앞의 20분을 날렸다.
리어가 사랑을 시험하고 코딜리어를 내치는 장면. 구혼자들에게 코딜리어는 더이상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코딜리어가 명예만은 지켜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도착했으니 초반 중요한 장면을 거의 날려먹은 셈인데 다행히 full video를 구할 수 있다는 모양이다. 인터넷 만만세...
이 <리어 왕>은 이언 맥캘런이 극중 리어와 같은 나이인 80세에 연기한 것으로 아주 호평에 호평을 탄 녹화본이다. 과연 최고의 배우를 위해 무대 세트며 다른 배우의 연기까지 완벽하게 그를 위해 맞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더라. 안 봤으면 많이 후회할 뻔했다. 극중 리어 왕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절대군주였다가 미리 은퇴하고 편하게 살겠다고 땅을 3등분해서 처분하자 고집 센 미친 1호선 영감탱으로 취급이 수직격하당하고 미쳐버린다.
리어가 왕일때 미친 1호선 할배의 모습을 이미 가지고 있었듯 미친 영감탱이 되고도 강력한 절대군주의 면모를 갖고 있는데 맥캘런 경의 연기 아우라+다른 인물들이 그에 대해 표하는 경의가 철저히 그를 중심으로 한 앙상블 구성으로 나타나서 ㅋㅋ 리어라는 인물의 복합적인 특성을 엄청 잘 구성함.... 그리고 맥캘런 경 연기 정말 신들린 듯 잘 한다고 느꼈던 게 완전히 정신 놓고 미친사람이 됐을때, 병상에서 코딜리어와 재회하는 장면, 감옥에서 코딜리어의 손을 잡고 세간은 두고 우리는 구경이나 하자꾸나 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현장도 아닌 녹화본인데도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극장 전체가 동요하면서 모든 사람이 흐느낌...; 이런 압도적인 진본의 아우라 처음이었음;; 어떻게 원어도 아니고 자막으로 보는 사람, 몇년이 지나서 녹화본을 보는 사람에게도 이런 아우라를 느끼게 하죠 대단한 배우는 다르다... 과거 내가 좋아했던 배우들은 거의 내면의 광기를 밀어서 봉인해제하는 ㅋㅋ 류의 연기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가령 게리 올드만, 제이크 질렌할이라던가.. 이제 완벽하게 절제된 상태에서 조용히 압도하는 연기자가 점점 경이롭게 느껴지고 보기도 편함.. 메릴 스트립 ㅠㅠ 이라던가... (후 이 사족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생각하며 붙이는게 맞음. 이미지만 봐도 너무 힘들다 저기 현실이랑 너무 구분이 안 되니까 이런 영화 만들지 말아주시겠어요 그가 본인의 성향 연기로 풀면서 건전하게 사는 점 너무 다행이고 좋지만 스크린에서도 보고싶지 않은 저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감당이 안 되네요;)
연극의 각색도 매우 즐거웠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켄트를 여성, 코딜리어를 흑인으로 각색한 것. 코딜리어와 켄트는 극이 표현하는 인간관(히히 욕망 권력 발싸)에서 질적으로 벗어난 인물로 그려지는 선역들이고 소수자인데 그들을 소수자로 표현한게 재밌었음.
권력을 잡으면 본성을 드러내고 악해지며 권력을 잃었을 때 실의에 빠져 착해지고... 시야가 넓어졌다고 울부짖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가난할때 착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라는 트윗이 생각난다..) 권력을 가졌을때도 자기 주관대로 행동하고 권력을 한순간에 잃는 상황이 닥쳤어도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두 인물의 권력을 박탈하는게 리어라는 점, 후에 정확히 이 두 인물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점이 좋은데 <리어 왕>은 결국 비극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줄리우스 시저>에서도 남역을 여성이 연기했는데 이때는 he라는 표현을 쓰고 그(녀)가 "여자는~"운운하는 대사를 치는 데 아이러니 포인트가 있었는데 여기서 켄트는 제대로 she가 됨. 마치 여성도 공작이 될 수 있는 시대인 것처럼 시침 뚝 ㅋㅋ떼고... 뒤에 거너릴과 리건이 데릴사위를 가지고 싸우게 되는 부분 정당성이 없어지지만 어차피 셰극 보는 사람들한테 그런 점은 중요한 게 아니니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졌던 것 같다 마치 정년이의 춘향전처럼... 어쨌든 그래서 켄트가 카이어스로 남장하고 내 정체는 상상도 못 할거라고 으스대는 장면들이 더 재밌어짐)
두번째로 리어가 장성급 군인의 복장을 하고 등장, 정복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 리어의 과한 자신감과 자존감의 기원 즉 훈장 주렁주렁 단 1호선 할배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세트도 히틀러식 연출이 떠오르는 흑/적, 휘장 등으로 으리으리하게 꾸며져 있는데 다른 성의 세트가 황량한 것과 대조됨. 그리고 프랑스 왕과 결혼한 코딜리어도 군복을 입고 나와 직접 전장을 지휘해서 리어-코딜리어의 공통점을 간명하게 보여줌.
둘 다 고집이 세고, 완고해서 패망할지언정 다른 사람 말 안 듣고, (코딜리어는 훨씬 조용한 방식이지만) 나쁘게 판단한 대상에 대해 악담을 함... 리어가 브리튼을 통일할 수 있었던 군주적 면모를 코딜리어가 가지고 있어 완전히 파멸한 리어를 구하려고 했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강조된다.
셋째로 거너릴과 리건의 캐릭터다. 거너릴은 앙겔라 메르켈이나 힐러리 클린턴을 연상시키는 단호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리건은 하이힐에 딱 붙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경박하고 수선스러운 이미지(그렇다 '창녀')를 갖고 있었고 리어를 거절하는 장면에서도 둘의 캐릭터를 살려 거너릴은 시종과 리어에게 단호히 명령하는 톤으로 말하고 리건은 우웅 어떡하지 리건짱은.. 거절하기 싫지만.. 그렇지만 아빠가 너무 민폐라고 제가 아니라 리건 언니가 생각하는걸욧 >.< 적인 이미지라서 코를 팠는데...
후에는 리건이 사람을 마음대로 다루는 용병술적 모습을 보여주더니 거너릴이 오스월드에게 사랑에 빠져서 절절 메고 간통죄로 고발당하고(ㄷㄷ) 리건이 권력을 손에 쥐고 단호하게 오스월드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식으로 이미지가 반전됨. 예전에 로열오페라 마술 피리 봤을 때 너무 그린듯한 창녀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가 계속 창녀로 끝나서 사실 유럽이 더 보수적인가?? 사실 영국에 있을때 그렇게 보이는 여성 많이 본 적 있는 것도 같고?? 킹스맨에서도 나오고?? 다른 영드에서도 담배피고 영하게 입고 남자에 미친 엄마 클리셰고?? 정말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대로의 인물군이 있다면 그들은 자기 이미지를 어떻게 그릴까?? 머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반전되어서 땀 닦았다. 남편들의 비중이 엄청나게 줄고 그들이 날개 얻은 듯 신나게 광인 캐릭터들의 충동적이고 잔인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매우 흥미진진했다.
더 쓰자면 셰익스피어는 여혐작가이지만 우주존잘이기 때문에 그가 혐오를 담아 넣은 캐릭터들도 빛난다.... 사실 그가 혐오를 넣어 만들었기 때문에 더 빛나는 측면이 있다. 왜냐면 그가 만든 질서선 남자 캐릭터들은 지루하고...또 지루하다... 물론 그는 궁정작가였으니 그 캐릭터들을 만들었겠고 당시에는 그런 캐릭터들이 인기있었겠지만...
셰익스피어는 광인들을 잘 쓰고(너무 잘 써서 소름끼칠 정도임 이렇게 광기를 잘 이해하면서 치밀함까지 갖추고 극을 쓰다니...그것도 많이...마감에 맞춰서... 그래서 이후 세대의 모든 광인_예술가들이 그를 찬양 또찬양 했나 봄 기능하는 광인의 절대지존임) 또 남캐의 경우는 그런 광인들을 매우 사랑함 ex) 리처드 3세 ㅋㅋㅋㅋ 는 거의 자캐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이번에도 오스월드가 리처드3세와 매우 똑같은 성격과 역할이었고 보면서 현대 한국에 태어났다면 전설적인 커뮤러였겠다 싶었음 다른 캐릭터들로 커뮤뛰긴 하는데 우주존잘인 점이랑 이기적이고 지밖에 모르는 자기애 넘치는 광인 너무 사랑해서 개인서사 주조연으로 무조건 넣어서 인증될 것 같다 머 이런 생각을 했다..
극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셰익스피어 너무 좋음.. 그리고 펭귄 클래식 번역 너무 구림 -_- ; 문장 하나하나를 짓이겨 으깨서 구글번역기에 넣고 돌린 걸 윤문한 느낌임.. 모르긴 몰라도 셰익스피어 전공자 다 분노하지 않을까...일단 나는 분노했다. 슬슬 고어체에도 익숙해지고 영어 뉘앙스에 대해서 조금 이해가 생기는 수준인데(만세!) 그래서 연극은 더 즐길 수 있었던 반면 집 가는 길에 텍스트 다시 읽어보니까 전혀 그 느낌이 아니더라.. 완전 감동에 젖어서 다시 읽으려다가 말았음
<리처드 3세>는 신정옥 교수 번역이 제일 좋던데 <리어 왕>도 읽어보고 싶다.. 과하게 원문에 집착하지 않고 한국어로 읽었을때 매끄럽고 아름다워서 원문의 뉘앙스가 잘 전달된다고 생각함. 아래는 펭귄 번역 내가 유일하게 갖고있는거 ㅠ 진짜 파파고 아니세요? 좋은점 딱하나 앞에 셰익스피어 연구자의 극 소개가 들어간 점 그거 하나 좋음. 느므느므 화가 나서 쓰려던 내용 까먹음 잠시 사라졌다 마저 쓰겠음...
"When we are born, we cry that we are come To this great stage of fools"
우리가 태어나면 이 거대한 바보들의 무대로 나왔다고 울어대는 거다.
"The oldest hath borne most: we that are young Shall never see so much, nor live so long
The weight of this sad time we must obey; Speak what we feel, not what we ought to say."
이 슬픈 시간의 무게에 우리 모두 복종해야 합니다. 해야만 하는 말이 아니라 느끼는 바를 말합시다.
가장 나이 든 분이 가장 심하게 겪었습니다. 젊은 우리들은 그 많은 일을 겪지도 않을 테고 그만큼 오래 살지도 못할 겁니다.
며칠이 지나고야 다시 돌아왔다. 쓰고싶었는데 까먹고 안 쓴 이야기만 짧게.
에드거가 거의 벌거벗고 빤쓰만 입고 나오는데 이안 맥캘런 경이 그와 마주치자마자 눈이 희번뜩하며 위아래로 스캔한 뒤 매우 끈적하게 잘해주는거다. 그 나이에 꼬추가 서신다는 부분 정말 잘 알 수 있었으며 (물론 연기도 섞여있겠지만 톤앤매너가 위트를 넘어서 너무 JJS있었음) 그가 사실 남색을 한다는 맥락은 아내가 없으며 딸들에게 불임에 대한 저주를 내리는ㅋㅋㅋ 리어 왕의 맥락을 다시 생각하게 함 재밌었음. 에드거 배우의 앗 존잘님 너무 좋은데 너무 민망하당ㅎㅎ; 표정도 귀여웠다..
오스왈드 캐릭터 맡은 배우가 아주 좋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아고 등 셰익스피어극 악당들만 전문으로 많이 맡았더라. 이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비슷한데 질투 많고 wicked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야망과 질투에 불탐. 이 캐릭터들은 너무너무 생생해서 셰익스피어 최애 자캐가 확실하지만 항상 극의 중심을 잡으면서도 극이 너무 똑같지 않은 정도로 활약한단 말이지..역시 존잘. 그리고 나는 눈썹이 짙고 큰 눈에 삼백안 희번뜩하지만 웃을때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남자가 콧대가 휜 남자가 너무 좋음. feat 톰 메이건..>2022년에 백업하려고 뒤지다가 또 현 성범죄자 과거 최애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거에요 눈물이 낫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