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입멸 전에 제자 아난다에게 말씀하시길, "아난다야, 너는 나의 입멸을 한탄하거나 슬퍼해서는 안 되느니라. 너에게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일지라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의 상태, 변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야,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져가는 것, 그 무너져가는 것에 대해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라."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정말 찰나였다. 일년에 세네번 손주들이 모이면 한사람당 5분 이상씩 장기자랑을 시키곤 "일을 안 하면 용돈도 없다"고 하시는 말씀에 그해 대학생이 된 막내 친척이 우리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돈 안 받을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할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큰 소리로 "저는 안 할게요" 라고 해서 모임이 뒤집어졌고.... 하필 왜 그 순간이었을까? 당연하게 남자만 따로 앉는 번듯한 상, 남자 손주들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쥐여주시는 두툼한 흰봉투, 여자 손주들의 이름도 잘 못외우시고 고모쪽 친척들은 대놓고 남 취급을 하시더니 장손의 입시 결과가 나오자 그보다 앞서 모 명문대를 간 고모 아들을 "요즘은 친척이 적어, 모두 한 가문이다"라고 강조하기 시작하는 모습, 남자가 여자가 시집이 여자는 공부를 하면...뭐 그런 말들에도 성인이 된 후로는 달리 실망한 적 없었는데 촛불을 훅 불어 꺼트리듯이 내가 가지고 있던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때 사라졌다.
(분개한 할아버지를 진압했던 건 의외로 아버지였는데 "대신 저희가 할게요"라고 하곤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는지 어쨌는지 해서 대충 넘어갔다. 나중에 나에게 효도는 자식들만 하면 되지, 손주들도 다 컸는데 억지춘향 시키는 건 좀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다시 봤었다. 반대로 평소 온화하고 가족들과 원만하게 소통하던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 소원도 못 들어드리냐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나중에 친척동생들과 만난 술자리에서 고모쪽 친척이 그랬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교통경찰한테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아냐고 호통치는 것도 본 적 있어." 당연히 우리 할아버지가 그럴 만한 사람인 건 아니고, 그냥 낙향해서 아는 사람만 아는 그뭔씹 가문의 그뭔씹^2 분파 문중 상대로 기념관(실제로는 컨테이너박스에 지붕만 올려둔 수준의)까지 세워가며 왕좌의 게임 1인극ver 찍는 사람이기 때문에 할아버지 얘기를 할 때 우리 입에선 조소가 떠나기 힘들다.
자기현시욕의 민낯이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운 만큼 할아버지 본인께서는 세계와 척을 져서라도 자기 욕망만 지켜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또 그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팔순 기념 문집으로 출판했다. 초등학교 학비도 내기 어려운 집안 사정상 손을 빌려가며 고학했던 일, 농사꾼만 있는 시골에서 공부를 시킨다는 질시와 일손 아쉬운 농번기 눈치에도 버텼던 일, 결국 '일꾼'이 필요해 대학 신입생 때 결혼을 해야했는데 이 사실을 학내에 알리기 쪽팔렸던 사연, 양장을 해입고 차를 타고 시골까지 어렵게 내려온 동기들 앞에서 도무지 양복을 구할 수 없어서 참담한 심정으로 한복을 입었는데 지방 풍습이 또 하객한테 진흙덩이를 맞는거라 그 옷마저도 더럽혀야 했고 동기들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대충 박수를 쳐줬다던 생생한 묘사.....이런 장면이 인상깊었다고 몇번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문집을 읽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는 점이 또 웃펐다.
사실 나조차도 그 문집을 읽거나 하면서 비교적 최근 실감하게 된 사실인데 할아버지와 나는 청년기 인생사가 꽤 겹친다. 시험이 안됐고, 글을 못 읽게 되는 정도의 정신질환으로 시간을 버리고는 어찌어찌 취직했는데 또 비슷한 직업에 비슷한 나이이기도 하다. 왜 아무도 우리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할아버지는 내 나이 때 지금보다 더 적은 월급에 먹여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는데다가 전국 순환근무로 시작했지만 정말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오랜 콤플렉스는 만약 내가 장손의 누나가 아니라 그냥 첫 손주였다면?하고 묻지만 더 그럴듯한 가설도 있다. (할아버지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령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할아버지보단 할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왜 아니겠어, 시험 될때까지만 농사 지어주면 될 줄 믿고 시집 온 막내딸이 결국 남편이랑 떨어져 살면서 쥐꼬리 월급으로 혼자 살림하랴 농사하랴 애들 키우랴 시집살이 하랴 고생하셨고 말년에도 좋아하시던 도시생활을 포기하고 할아버지 따라 낙향해서 또 농사 지으셨는데. 할아버지의 과시욕은 할머니의 헌신 앞에서 더 황당한 모양이 된다.
할아버지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이 반복의 사이즈가 줄어들까? 알 수 없지만 이 명명백백한 유사성을 성별이라는 구분 때문에 못 본체 넘어가는 건 또 다른 어리석음이고, 지금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긴 할 듯.
1년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정정하시다 못해 땅을 놀려두는 걸 못 참고 농사로 소일하셨다. 그러다 체력에 부쳐 농사를 그만두게 되니 몸이 급속도로 약해지며 이것저것 다른 질환도 발견되고 파킨슨이 어쩌고 뇌혈관이 어쩌고 의사들도 뇌가 이지경인데 어찌 말씀을 하시고 생활을 농사까지 지으셨냐며 정신력이 대단하시다고 기함을 했는데 이번에는 또 뇌경색이 심하게 오셔서 아버지가 왔다갔다 하며 돌보고 계시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친척들은 위에 썼듯 스타일이 백만광년 차이가 있어서 여러가지 일들을 아버지가 나에게 상담하시고 내가 서포트하는 형태로 일이 돌아가고 있어서 부하가 걸리는 거지 그냥 나 자체로는 별로 느끼는 바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비공개 일기장에서 꺼내올 게 있을까 뒤적거리다 보니까 바로 몇달 전에 제법 애틋한 기록이 나와서 놀랐다. 지금의 마음 또한 금세 잊겠지, 그래서 남겨놓는다.
할부지 진짜 노망낫거든.. 옛날부터 슬슬 기미는 있었고 이제 파킨슨이라 완전 한눈에 보이는데 저번에 신체적으로 보이는 상태 처음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용돈 찾아주신거 보고 엉엉 울고 어제는 그래도 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오늘 잠깐 낮에 자다가 할아버지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신 꿈 꿈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그러나 10년 전에나 마지막으로 보았던 또렷한 정신과 맑은 눈으로 "ㅇㅇ야~"하고 부르시면서 손 살짝 내미시는데 그거 잡으면서 할아버지 전 할아버지 보낼 준비를 다 했는데 이러시면 어떡해요 이렇게 옛날 모습으로 돌아오시면 제가 어떻게 보내요 가지 마세요 할아버지 하고 엉엉 울면서 깼다 그 모습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울면서 깼다는것도 충격이고 우리 친가 남녀차별 ㄹㅈㄷ고 나이차이 비슷한 손주 셋중에 나만 여자라 내가 제일 상처 많이 받았는데 내가 나이차이나는 장녀라 할아버지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 많다는게 또..(할아버지가 어렸을때 애들 시골에서 길러야 한다는 철학이 있어서 동생 태어나고 아주 어렸을때부터 옆에 끼고 길렀음 정작 동생은 너무 어렸을때 일이라 기억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