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블로그에 올릴 재료들을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또 n년 전 열공했던 기록을 봤는데 정말...지금 진로를 따져보았을 때 1도 도움이 안 된데다 앞으로 쓸모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혹시 약을 팔 일이 생겨도 소용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다 까먹었으니까... 그때 내가 처절하게 씹어 삼켰다고 생각한 공부의 기록은 마치 초면의 그뭔씹 나무위키 게시글을 보는듯 신기하고 재밌기만 했던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걸 뭘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했는지 황당해서 웃음만 나왔다. 심지어 가장 애를 먹었고 열심히 했던 통계와 프로그래밍은 까먹은건 둘째치더라도 너무 시류가 지나서 국 끓여먹을 건더기도 안 남았다. 그런데도 내나이 환갑에 팔자에도 없는 수학뇌 만든다고 갖은 고생을 다 시키고...심지어 또 나름 잘해서 새로운 영재성 발굴한 줄 알았는데 누가 알았으랴 어렵게 발굴한 영재 데리고 살 생각이 세상만 없었던 게 아니라 나 스스로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지금은 알x몬 이력서에서도 숨김 처리하는 화석이 된 걸.....
....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은사님이 해 주셨던 이야기가 제법 위안이 되는데 지금은 너무나 자유롭고 지혜로운 그분도 한때 오리엔탈 쓋 기운수련에 미치셔서 이런저런 옥장판을 사다 못해 피라미드의 기운을 끌어모아 수증기를 천장에서 쏘는 장치?를? 온 집안에 설치해놔서 애기가 기어다닐 공간조차 없었다고 했다. (여기서 잠시 "정말 상처를 많이 받은 걸 아니까, 그 마음을 이해하니까 내버려 뒀지 뭐..."라고 술회하셨던 아내분이시자 또다른 은사님의 사랑을 존경하는 시간)
"그래서 그거 어쩌셨어요? 중고장터에 파시지도 못하셨을 거 아녜요?"
"당연히 다 버렸지!! 버리느라 고생 좀 했어! 하하하하!"
어찌나 시원하게 웃으시던지 나도 언젠가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마음 한켠이 쓸리는 기분이었는데 내 방에 한가득 쌓여있던 절판자료랑 값비싼 전문서적을 다 정리하고 옷으로 채워놓자 그렇게 시원하고 후회가 전혀 없을 수가 없긴 했었다. 솔직히 종이벌레 곰팡이 등이 걱정됐긴 했기 때문에.
그래도 공부 자체에 현타가 온 건 마찬가지라서 습관처럼 책을 계속 읽어치우다가도 뒤돌아서면 다 무슨 의미인가 싶었는데(최근 불교 관련 책을 열심히 읽는 중이었던지라, 인류1등 다이아수저 초천재 고타마 존자조차도 수많은 삽질을 했다는 사실을 위안삼긴 했다. 독이란 독은 다 먹어보고 고행이란 고행은 끝판왕으로 추구해보곤 결국 '소용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때는 정말이지 기쁨이 신체적으로 오소소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우연히 선물같은 글을 만나 눈앞이 흐려지는 경험을 했다.
생각 이전에 너무나 큰 다정함이 느껴져서 눈물부터 쏟았는데, 뒤늦게 이유를 붙여보자면 이 글이 가리키는 마음이 내가 상상하는 깨달음이자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얻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여러 책들을 읽고 생각해왔던 이유는 바로 이런 앎들이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군데군데 이정표가 되어 내가 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이런 표지를 만났을 때 내가 외롭지 않은 마음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구체적으로는 할아버지를 보내드리기 전에 아래의 글 같은 마음에 닿을 수 있다면 하고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 글에 기대어 만나 또 한참을 울었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있었습니다. 집도 절도 없고, 편지도 접견도 없는 분입니다. 전과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감방에서 대접도 못 받고 한쪽 구석에서 조그맣게 살고 있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기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때가 있습니다. 신입자가 들어올 때입니다. 신입자가 입소 절차를 마치고 감방에 배치되어 들어오는 시간이 아마 이 시간 쯤 됩니다. 대부분의 신입자들은 문지방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와서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화장실 옆 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대단히 긴장된 이 순간이 노인이 나서는 순간입니다.
“어이 젊은이”하고 부릅니다.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신입자는 그 소리가 매우 반갑습니다. 그러고는 노인다운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형은 몇 년이나 받았고 만기는 언제냐는 등 정말 눈물 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일루 와봐’하고는 노인 옆으로 불러 앉히고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긴 인생사를 이야기합니다. 신입자가 들어오자마자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삼일 지나서 이 노인이 감방에서 별 끗발이 없다는 걸 알고 나면 일정때부터 시작되는 그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첫날 저녁에 바로 시작해야 꼼짝없이 끝까지 듣습니다. 그 노인과 3~4년을 함께 살고 있는 우리도 신입자가 들어올 때마다 그 이야기를 또 듣습니다. 그가 빠트린 것이 있으면 우리가 채워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노인의 이야기가 계속 각색된다는 사실입니다. 창피한 내용은 빼고, 무용담이나 미담은 부풀려 넣습니다. 1~2년 사이에 제법 근사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각색된 이야기에 도취되어 어떤 대목에서는 눈빛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젊은 친구들은 노인네가 ‘구라푼다’고 핀잔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과거가 참담한 사람이 자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늦가을이었습니다. 하염없이 철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노인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노인의 야윈 뒷모습이 매우 슬펐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분이 늘 얘기하던 자기의 그 일생을 지금 회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저분이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색한 인생사에는 이루지 못한 소망도 담겨 있고, 반성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실제 인생사와 각색된 인생사를 각각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자를 ‘사실’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저 노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의 주인공으로 그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늘 이야기하던 일정 시대와 해방 전후의 험난한 역사가 그의 진실을 각색한 것이 사실로서의 그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진실이 사실보다 더 정확한 세계 인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은 그때 그곳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이런 책을 익명의 모르는 카페 회원이 제일 좋아하는 책으로 꼽았다는 이유로 보고싶은 책 설정을 해놓음+장서가 얼마 없는 디지털 도서관에서 정말 어쩌다 눈에 띄어 빌려보게 되었다는 점이 정말 깊은 위로로 느껴진다. 그것도 지금처럼 마음이 힘들 이유가 많이 들어온 시기에.... 오래전부터 내게 초능력이 있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 책을 찾아내는 능력일 거라 상상했는데, 내가 버티기 위해 몰두했던 것 중에서 나를 지탱해준 건 오로지 공부인 것 같다고 다시한번 생각했다.
이제 이해되어 덧붙이건대 부처님께서도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셨다.
한 나그네가 넓은 강에 이르렀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건너야 했다. 다리도 나룻배도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뗏목을 만들어 노를 저어 강을 건넜다. "나그네가 뗏목을 어찌해야 합니까? 큰 도움이 되었으니 어디를 가든 질질 끌고 다녀야 합니까? 아니면 그것을 강변에 그냥 묶어두고 자기 갈 길을 가야 합니까? 내 가르침 역시 뗏목과 같습니다. 강을 건널 때만 쓰면 되지, 늘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내 가르침의 본성이 뗏목과 같다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나쁜 가르침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가르침도 다 버리게 될 것입니다." ㅡ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전에 읽었던 이 대목이 지금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가슴 속 진실로 느껴진다. 그래서 또 다른 상상, 내가 온 길에는 뗏목이 줄줄이 버려져 있다. 필사의 노력으로 만들었지만 버렸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필요 없어졌기 떄문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새 뗏목으로 다른 강을 건너간다. 그냥 그 사실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