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4. 레포트로 제출.)
1. 서론
지구 문명이 외계인, 공룡, AI 등 타자와의 접촉으로 파멸하는 숱하게 있었고 또 제작되며 대중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우리가 현재 과학과 합리주의의 세계에서 살고 있고, 영화 제작 산업은 그 첨단 기술이 빠르게 유입되는 분야 중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가상의 혼돈-재창조 내러티브는 인위적으로 사회를 혼돈 상태로 끌고 갔던 종교적 의례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과학의 발전으로 상징되는 직선적 시간관이 픽션에서나마 전복되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복구되는 이러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제작되고 대중들을 끌어모으는 현실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SF영화 중 가장 최근의 예를 들자면 리들리 스콧의 영화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기술적 진보’를 상징하는 <프로테메우스>라는 이름은 여기서 인간의 창조주 외계인의 행성으로 떠나는 탐사선의 이름이 된다. 리들리 스콧, 에일리언 프리퀄, 엄청난 자본을 투입한 SF 블록버스터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가진 이 영화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영화가 공개되자마자 평은 양극단으로 갈렸다. “참신하다. SF의 신화를 다시 썼다”는 호평과 “기존의 SF를 답습할 뿐 뻔하다”는 악평이다. 이 두 비평이 모두 합당한 까닭은 <프로메테우스>가 위에서 서술했던 SF의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가는 영화이면서, 그 클리셰 안에 숨어있는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SF장르에서 반복되는 혼돈-재창조 내러티브의 반복에 들어있는 의례적 성격을 <프로메테우스>가 가지고 있는 시간관이라는 예시를 통해 분석해볼 것이다.
2. 혼돈과 종교적 시간
대부분의 신화는 원초적 혼돈에서 질서를 부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의 원초적 창조력은 혼돈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이 된다. 혼돈 자체가 창조의 잠재력으로 충만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적 의례는 엄숙한 절차 후에 사회 전체를 일시적으로 혼돈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대규모 축제를 동반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농경의 풍요를 관장하는 바알이나 아도니스와 같은 신들을 섬기던 가나안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축제다. 이들 축제의 대표적 특징은 에로틱한 분위기다. 바알 신을 위한 축제에서는 남녀가 신전에서 성행위를 갖는 경우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진행하는 이러한 의례는 이들에게 기원과 감사의 표현이며, 농사의 풍요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실제적인 효과마저도 발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가나안 지역의 사람들은 계절의 반복을 통해서 모든 만물의 성장과 소멸, 그리고 부활이 영속되어 나가는 자연과 밀착하여 살아가는 농경민들이었고, 계절의 리듬에 맞추어 한해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고, 수확에 감사하며, 소생의 축복을 바라는 ‘순환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축제에서 표출되는 무질서는 혼돈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혼돈에서 비롯되는 창조력을 다시금 활성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죽음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시간을 재창조하고 창조의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는 장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례에서는 창조-혼돈-재창조의 연쇄적 순환고리를 가지는 순환론적 시간관이 발견된다.
반면, 같은 가나안 지역에서 파생한 유일신인 야훼는 시간과 역사의 신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죄의 대가로 시간과 역사의 차원이 고통스러운 삶으로 얼룩지게 되었지만, 기독교에서 시간과 역사는 신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으로, 기독교의 신은 시간과 역사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계시하기 때문에 시간과 역사는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매개물일 뿐만 아니라 무시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실재였다.
이러한 ‘직선적 시간관’에서 보았을 때에, 가나안 종교가 보이는 순환적 시간관은 시간을 감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도피 행위였다. 때문에 이런 순환적 시간관을 가진 종교전통은 ‘우상 숭배’로 규정되어 금지되었으며,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지만 단일적 창조와 심판을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에서도 순환적 시간은 종교 의례를 통한 주기적 신성 체험과 카니발 등의 의례로 유지되었다.
3. 근대성의 위기와 SF영화
직선적, 진보적 시간이 고대부터 있어왔던 순환적인 시간을 세계 차원에서 대체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근대라는 개념이 세계적인 규모로 전파되기 시작한 그 시기와 때를 같이한다. 현대의 역사관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합리화되고 세속화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기독교가 발생시킨 역사적 시간관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심판과 구원으로 끝나는 직선적 시간관을 이루는 기독교 사상은 현재 세계의 주류를 이루는 근대성의 기저에 있다. 이러한 시간관 아래에서 수치적 통계와 과학 문명의 가시적 발달 외의 많은 것이 과학과 합리성의 뒤로 사라졌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제 자연적 순환으로 알 수 있는 시간이 아닌 기계적으로 분절되는 시간에 의존하여 삶을 구성하게 된다.
조홉은 「분단영화의 판타지 재현에서 드러나는 카니발 적 시간과 정치적 변환의 가능성」에서 Postone의 견해를 인용하여 이를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적 시간의 리듬이 억압되고, 대신 전혀 다른 리듬의 시간이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간은 전체로부터 이탈된 회복 불가능한 파편으로 존재하며, 그런 이유에서 더 이상 자연현상의 일부가 아니라, 구축되고, 체계화 된 목적론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에 대한 의미의 변화와 더불어 나타난 사회적 변화는 종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회그룹이 점점 더 시간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지적한다. 근대에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직선적 시간으로의 통일이 오히려 근대성에 대한 회의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첨단 기술이 가장 빠르게 유입되는 영화, 그것도 과학 기술이 중심 소재가 되는 SF영화에서 혼돈-재창조의 내러티브가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몸짓의 일부라고 해석할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했듯, 영화의 힘은 매시간 부딪치는 현실의 문제거리들과 현실적이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도록 하는 데 있으며,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놓쳐 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가기 때문이다.
<에일리언>, <우주전쟁>, <인디펜던스 데이> 등에서 등장하는 외계인은 그 존재 자체로 기독교적 질서를 전복시키고, <A.I.>,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등에서 등장하는 로봇은 인간이 창조한 산물이되 위기를 초래한다. 이러한 타자의 유입과 이로 인해 초래되는 위기는 근대성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이들의 유입으로 혼돈을 겪은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이전과 같은 존재방식을 취할 수 없고 자신을 재창조한다.
다시말해 SF영화의 혼돈-재창조 내러티브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인위적인 반복은 혼돈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혼돈에서 비롯되는 창조력을 다시금 활성화시키기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시간을 재창조하고 창조의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례적 성격을 띄고, 순환론적 시간관을 엿볼 수 있다. SF영화의 혼돈-재창조 내러티브와 의례는 모두 소진된 삶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창조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추동된다. 또한, 혼돈-재창조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는 영화가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구조 역시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는 의례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4. 프로메테우스의 시간관
최근 개봉한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는 이러한 SF영화의 혼돈-재창조 내러티브를 잘 보여주고, 그 내러티브 자체를 영화의 중심 소재로 삼는다. 영화의 전개를 이끌어가는 중심 소재인 ‘검은 물질’은 DNA를 해체함으로써 기존의 생명체를 죽이는 도구이면서, 그 해체된 DNA를 재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도구이기도 하다. 영화는 외계인이 이 ‘검은 물질’을 먹고 산산히 분해되는 장면이 DNA의 합성과 연결되며 시작한다. 다음 장면에서는 고고학자들의 탐사에 의해 이들이 바로 인간의 창조주인 것이 밝혀지며, 인간들은 이들에게 ‘엔지니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행성으로 탐사선 ‘프로메테우스’를 보낸다. 이 탐사선을 관리하는 것은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된 안드로이드인 ‘데이빗’이다. 영화는 이렇게 오프닝에서부터 창조와 파괴, 재창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환론적 고리와 기존 세계관의 전복을 암시한다.
그리고 결국 찾아낸 엔지니어는 인간을 멸종시키려 하다 영문모를 참사를 당해 당초의 목적을 실행하지 못했음이 드러나며, 깨어나자마자 자신을 찾아온 인간들을 살해하며 다시 한번 지구로 향하려는 엔지니어를 막기 위해 프로메테우스는 자폭을 감행한다. 결국 인간이 어째서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미궁에 빠진 채 답을 잃는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홍보 영상에서 안드로이드의 발명을 언급하며 “이제 우리가 신입니다.”라고 야심차게 말했던, 근대성과 직선적 시간관을 상징하는 인물. 데이빗의 창조자 피터 웨이랜드는 조물주를 찾아내 죽음을 정복하려는 의도로 비밀스럽게 프로메테우스에 탑승했지만 그렇게 고대하던 엔지니어와 만난지 몇초 되지 않아 살해당하며 혼돈 속으로 편입한다, 프로메테우스의 나머지 승무원들은 엔지니어를 막기 위해 같이 자폭하고, 엔지니어 역시 살해당한다.
혼란의 중심에는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있다. 창조자를 찾으러 외계에 나선 인간들을 보조하는 피조물인 그의 입지는 그 자체로 창조자-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엔지니어는 우리를 대체 왜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에 "인간은 저를 왜 만들었을까요?"라는 답변으로, "만들 기술력이 있으니까 만들었겠지"라는 답변에 "살아있는 엔지니어(창조자)가 박사에게 그렇게 대답하면 기분이 좋을까요?"라고 대꾸하는 장면은 그의 아이덴티티와 더불어 언뜻 수직적이고 의미심장해 보이는 ‘창조’행위 안에 내재되어있는 혼돈을 보여준다.
그는 충실하게 인간을 보조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안드로이드이지만 인간을 자신보다 수준 낮은 생명체로 생각하고 인간의 일부분을 혐오한다. 그는 탐사 과정 중 빼돌린 ‘검은 물질’을 통해 찰리를 감염시킨다. 그리고 찰리와 관계를 맻은 쇼가 괴물을 잉태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적출하지 않고 그녀를 잠재워 지구까지 데려가려고 한다. 쇼는 필사적으로 탈출해 괴물을 적출하고 말소하지만, 이 괴물은 후반부까지 살아남아 엔지니어를 감염시킴으로써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데이빗의 피조물이 수직적 관계 상으로 훨씬 위에 위치한 엔지니어를 희생양 삼았다는 점은 조물주와 피조물로 이어지는 수직적 관계를 통째로 혼란에 빠트린다. 삶과 죽음이 혼재되는 이러한 혼돈을 통해서, 영화는 인간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결코 온전한 해답을 얻어낼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그려낸다.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이 차례로 살해당하고, 데이빗 역시 목만 남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인물은 주인공 ‘엘리자베스 쇼’다. 엘리자베스 쇼는 아버지 대부터 내려오는 가톨릭적 믿음을 십자가 목걸이로서 간직하고 있으면서, ‘내가 내 믿음을 선택했다.’는 아버지의 믿음을 충실히 새기고 있는 인간이다. “(창조주를 찾았으니)이제 그 목걸이는 필요 없지 않아?”라는 물음에 “그럼 그들은 누가 만들었는데?”라고 대꾸할 정도로 신실했던 그녀는 이 영화에서 가장 큰 혼돈을 겪게 된다. 데이빗에 의한 ‘검은 물질’의 감염으로 남자친구를 잃고, 감염된 상태에서 맻었던 관계로 불임인데도 괴물을 임신하게 된다. 이 때 데이빗은 의기양양하게 목걸이를 가져간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쇼는 탐사에 끝까지 동행하고, 엔지니어의 공격에서 살아남고 프로메테우스에게 엔지니어가 지구로 향한다는 말을 전한 것도 그녀다. “난 더 이상 못 하겠어.”라며 남자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울기도 하지만, 추락하는 우주선을 피해 살아남고, 자신이 낳은 괴물의 입에 엔지니어를 들이밀어 둘 모두를 퇴치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그녀는 머리만 남은 데이빗에게 가장 먼저 목걸이를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엔지니어가 있던 행성으로 돌아가 “어째서 인간을 창조했는지” 묻기 위해 떠난다.
혼돈의 끝에서, 쇼의 믿음은 기존의 ‘인간의 뿌리를 알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니라 ‘그 끝에 영영 다다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끝내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재창조되어 자리잡았다. 그렇기에 쇼의 결단은 한없이 숭고하고 힘이 있다.
영화의 메시지 역시 쇼의 결단과 다르지 않다. 직선적 시간관은 전복되었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순환적인 창조-파괴, 즉 혼돈의 반복이다. 인간은 창조-소멸의 직선적 시간에 서있지 않을 수 있을뿐더러 아무 이유 없이 창조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혼돈을 겪고 난 다음에 인간은 더욱 숭고하고 한 발 더 나아간 결단을 내릴 수 있다. 혼돈(데이빗)을 통해 소진된 삶의 흐름을 중단시키고(피터 웨이랜드) 새로운 창조의 계기(엘리자베스 쇼)로 이어지는 혼돈-재창조 내러티브가 담고 있는 의미 자체에 대한 탐구가 <프로메테우스>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5. 결론
순환은 ‘영원성’을 지니며 그 순환의 고리 안에서 자아의 성찰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순환적 시간관은 의례라는 형태로 반복되며 끊임없이 인간을 재창조해 왔으며, 이제는 영화라는 반복 가능한 시간의 기록매체 역시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세계관 구성에 일조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는 세계관 분석의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며, 영화가 담고 있는 반복적인 내러티브 패턴은 반대로 이를 소비하고 창조해내는 인간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지도가 될 것이다.
기독교에서 비롯된 직선적 시간관은 근대성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나가 세계를 통합시켰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종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회그룹이 점점 더 시간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졌고, 기계적으로 분절된 시간관은 근대성에 대한 회의를 초래했다.
SF영화에서 이러한 회의는 외계인 등 타자와의 조우로 근대성이 해체되는 혼돈을 겪는 내러티브 패턴이 클리셰로 자리잡아 끊임없이 생산되는 현상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내러티브 패턴은 또한 재창조로 이어짐으로써 혼돈에서 창조력을 공급받으며, 의례적 시간 안의 순환과정과 유사한 성격을 드러낸다.
<프로메테우스>는 혼돈-재창조 내러티브를 따라 직선적 시간관의 전복을 다루면서, 순환론적 시간관과 의미 자체에 대한 성찰까지 자세히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혼돈-재창조의 순환을 통해 인간은 시간의 비가역성을 뒤집을 수 있으며, 혼돈을 극복함과 동시에 자신을 끊임없이 재창조해나가는 주체로서의 기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이희연, 「'사회적 시간' (Social time)의 '기계적 차원'과 '순환적 차원'에 대하여 : 종교적 '상징'과 '의례(Ritual), 그리고 '축제'를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조홉, 「분단영화의 판타지 재현에서 드러나는 카니발 적 시간과 정치적 변환의 가능성」, 『문학과 영상』, 제8권 3호, 2007.
한국종교연구회, 『종교 다시 읽기』, 청년사:파주, 1999.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경북:분도출판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