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30.)
<더 폴>의 주인공 로이는 가진 걸 다 잃은 삼류 스턴트맨입니다. 촬영 중 큰 사고를 당해서 하반신이 나갔는데, 연인은 그때 다른 남자와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어요. 한순간에 반신불수, 마약중독자, 알콜중독자가 돼버린 그는 죽을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계획이란 호기심 많은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껌뻑 죽을 만큼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더 듣고 싶으면 ‘모르핀’이라고 쓰여 있는 약병을 가져오라”고 꼬드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에 흠뻑 빠진 알렉산드리아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훔쳐온 약은 가짜였고 절망감에 몸부림치는 로이를 위해 다시 약을 훔치려던 알렉산드리아는 발을 헛디뎌 크게 다치고 맙니다. 죽다 살아난 알렉산드리아가 이야기를 마저 해달라고 부탁하자, 로이는 등장인물들을 모두 죽여버립니다. 로이 자신을 대입했던 주인공의 죽음만 남겨둔 순간, 알렉산드리아가 울음을 터트립니다. "왜 모두를 죽이는 거죠?" 로이는 흐느끼며 대답합니다. “그에겐 남은 게 없어.” 우리는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울음을 터트립니다. 내몰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 하나의 탓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무언가 하나만 바뀌었어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거에요. 돈 많은 스타가 로이의 애인을 탐낸 것, 애인이 돈 많은 스타에게 넘어간 것, 로이가 사고를 당한 것, 하필이면 반신불수가 된 것, 그런 사건들은 유기적인 연관관계가 없어요. 모두가 조금씩 잘못했으니 비난의 대상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몰아간 것은 로이 자신입니다. 어린애를 이용해 자살기도를 하려고만 않았어도 상황은 좀 더 나을 수 있었겠죠. 적어도 알렉산드리아는 다치지 않았을 겁니다.
순전히 재수 없게 상황들이 꼬였을 뿐인데도 결과는 참담합니다. 죽을 만큼 후회해도 소용이 없죠. "재수가 없다"는 가벼운 표현보다는 그리스의 비극에 어울리는 슬프고 우울한 일입니다. 가장 슬픈 건 현실에서나 영화에서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겁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는 잭을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보내고 나서야 골목에 처박혀 울음을 터트리고, <색, 계>의 이는 왕치아즈를 사형장에 보내고는 침대의 눌린 자국을 쓸어봅니다. <인셉션>에서 자신이 죽게 만든 거나 다름없는 아내 멜에게 코브가 할 수 있던 말은 “난 당신을 구하려고 했어”라는 변명뿐이었고, <해피 투게더>에서 아휘가 세상의 끝에 버리고자 했던 말은 흐느낌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는 건, 우리가 이런 슬픔을 견디고 살아 있다는 말도 되는 거겠죠. 비극은 절망과 함께 끝이 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요. 절망이 드리워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그리워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으니 잭과 에니스가 다시 만나 키스를 나눴겠지요. 하지만 잭을 만나지 못하는 세월 동안에도 에니스는 잘만 살았습니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데리고 나름대로 행복하게요. <인셉션>의 코브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는 멜에게서 벗어나지 못했고, 꿈속으로 도피해 가족을 만나는 망가진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직업을 잘 유지하며 이럭저럭 살았어요. 결국, 코브는 현실로 돌아가고, <해피 투게더>의 아휘는 혼자 도시에 남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결말에서 죽은 잭의 옷을 끌어안은 에니스는 “맹세할게, 잭”이라고 말하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끌어안고 ‘살아갈 거라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더 폴>의 로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설득에 넘어가 결국 주인공을 살려내고 이야기를 해피앤딩으로 끝맺습니다. 로이 본인도 살기로 마음먹고 하반신 마비도 극복해 스턴트맨으로 복귀해요. 하지만 그를 떠난 연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나, 그가 부상까지 당해가며 찍었던 스턴트 장면이 편집 당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영화는 로이의 스턴트 장면들을 보며 깔깔대는 알렉산드리아의 독백으로 끝나지만, 그 장면들 속 로이의 모습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스턴트맨입니다. 몇백 번을 돌려보아야 그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잠깐 나오는 조연에, 역할이라곤 맞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죽는 것밖에 없어요.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스턴트 장면들 속 익명성은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을 대입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끊임없이 삶에 두들겨 맞아야 해요. 그런데도 이럭저럭 살아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슬픈 일입니다.
<더 폴>을 포함해서 위에 썼던 영화들은 제가 울었던 기억이 특정 장면들과 함께 남아 있는 영화들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우는 일은 많지만 어떤 장면을 보면서 운 기억이 남는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문득 그 몇 안되는 기억들을 늘어놓아 보았을 때 어떤 이야기가 생기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 생각 하나로 글을 써내려갔어요. 나를 울게 했던 모든 장면이 현실 앞에 무릎 꿇고 무너지는 순간들을 담고 있었다는 건 인상적인 발견이었습니다. 그게 저에게는 가장 슬프고 참담한 상황이었다는 뜻이겠죠. 여기까지 생각해 본 뒤에 그 상황에 대입할 수 있는 자신의 기억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기억나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저를 울게 했던 영화들을 잊었듯이 말입니다.
누구나 그럴 것처럼 저도 자주 울고 많이 상처받는 편입니다만, 돌이켜 보았을 때 슬플 수 있을 정도로 남은 상처들은 많지 않습니다. 덕분에 제게 삶이란 늘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요?
가장 큰 상처도 언젠가 무뎌지고 기억나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절망을 넘어가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될 순간들도 올 수 있겠죠. 그래도 그 아래엔 지나온 흔적들이 누덕누덕 지워져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일 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