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7.)
성장영화라는 장르, 소수자로서의 정체성
<문라이트>의 주 소재는 흑인(블랙) 사회적 약자인 성소수자(리틀)이다. 또한 1부의 소제목 ‘리틀’은 작은 아이였던 샤이런이 성장하는 성장영화임을 암시한다.
리틀, 샤이런, 블랙
소년부터 성인까지의 긴 시간을 다루고 있는 <문라이트>의 캐릭터들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라이트>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의 다른 세 인생시기를 다루고 있고 이에 따라 세 사람의 다른 배우가 세 개의 다른 이름을 갖고있는 한 명의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3개로 분절된 서사는 각각 3막구조의 발단-전개, 위기-결말을 담당하면서 각 부에서도 독립된 기승전결의 전개를 보인다. 즉 한 인물의 연속적인 성장기인 동시에 따로따로의 완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의 분절과 연속성은 구조인 동시에 주제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관객들은 어떻게 1부의 리틀이 2부의 샤이론, 3부의 블랙과 동일인인지 알 수 있는가? 막의 구조가 바뀔때마다 관객은 이야기의 중단과 계속에 놀라게 되며 다시 등장한 주인공의 성장한(달라진)얼굴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주인공을 가장 깊게 다루는 일대기라는 장르특성을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머니와 케빈
이런 구조에서 조연들, 주변인물들은 극과 극을 연결하고 리틀-샤이런-블랙에게 연속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관객들은 주변인물들의 얼굴과 이름이 언급되고 주인공과의 관계가 연속성을 갖고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알았을때야 서사의 연속성과 안도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어머니는 유일하게 같은 배우가 3막 내내 연기하는 역이고, 테레사 역시 1부부터 3부까지 이름이 꾸준히 언급된다. 후안은 1편에만 등장하지만 2편에서도 이름으로, 3부에서는 그가 제시했던 달빛과 바다의 이미지로 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케빈도 계속 달라지는 얼굴을 하면서 샤이론의 곁을 맴돈다.
즉, 문라이트에서 인물은 연결을 상징하는 극적 장치이며, 주제의 한 축을 지탱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 이는 주인공 샤이런을 제외하면 1부부터 3부까지 모두 출연하는 유이한 캐릭터인 어머니와 케빈을 분석할 때 잘 드러난다.
둘의 차이점은 각각 샤이런이 인생에서 마주치는 역경을 드러낸다. 어머니는 흑인 빈곤층으로 태어난 출생을 대변하고, 케빈은 남성을 사랑하는 샤이런의 성적 지향을 대변한다. 어머니는 유일하게 1부에서 3부까지 같은 배우(나오미 해리스)가 연기하지만 끝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 그녀는 흑인 빈곤층으로 마약가 근처에 살면서 마약을 접하고 스스로 생을 망가트린다. 그리고 샤이런에게 ‘게이새끼faggit’라고 부름으로서 최초의 트라우마를 준 존재이다. 케빈은 샤이런과 마찬가지로 1부부터 3부까지 모두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제이든 파이너, 자렐 제롬, 안드레 홀랜드). 샤이런이 훗날 사용하게 되는 또 다른 이름(블랙)을 직접 부여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샤이런에게 불을 가르쳐준 존재이며, 최초의 성경험을 준 존재이다. 또한 다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감옥에 다녀오고, 기술이 없어 감옥에서 배워온 요리실력으로 다이너에서 일하며 좁은 집에서 사는 사람이다.
어머니와 케빈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단 이 둘은 1부부터 3부까지 모두 출연하며, 샤이런의 꿈에 나오는, 다시말해 샤이런의 무의식까지 침범할 정도로 중대한 영향을 준 존재이다. 어머니는 3부의 꿈 장면에서 샤이런에게 소리를 지르고, 케빈은 2부의 꿈 장면에서 여자친구와 섹스하는 모습을 샤이런에게 보인다. 둘은 샤이런에게 중대한 상처를 준 존재이기도 하다 1부의 클라이막스는 어머니가 샤이런에게 욕을 하는 장면이고, 2부에서는 케빈이 샤이런을 때린다. 3부는 먼 곳으로 떠나 다른 사람인것처럼 체형과 직업, 성격을 바꾼 블랙을 이 둘이 사과와 관계 회복을 위해 부르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3부의 중간점에서 블랙은 어머니와 화해하고, 클라이막스에서 케빈과(그리고 샤이런의 과거와 샤이런이) 화해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그들과의 갈등은 1부와 2부의 중심 내용이며, 3부의 화해는 샤이런에게 주어진 최초의 이미지로 돌아가는, 회복과 성장에 대한 직유다.
리틀-샤이런-블랙과 3막구조
<문라이트>는 리틀-샤이론-블랙으로 이어지는 정확한 3막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구조가 리틀과 블랙 사이에 ‘끼인’상태로 보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샤이런의 피할 수 없는 인종적, 성적 소수자성을 암시한다.) 리틀이었을 시기에 샤이런은 앞으로 마주치게 될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마약을 시작한 어머니, “게이새끼faggit가 무슨 뜻이에요?”). 그렇지만 샤이런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음으로서 상업영화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신하고 있다. 위험한 슬럼가의 분위기와 성적 지향과 더불어 내성적이고 평화지향적인, ‘여성스러운’ 샤이런의 성격은 앞으로 샤이런에게 방해요소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태도가 무너지는 것은 2부 ‘샤이런’에서이다. 샤이런은 아이들의 괴롭힘을 무시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권력을 쥐고 있는 타렐의 괴롭힘은 샤이런이 사랑에 빠져있는 상대이자 샤이런과 마찬가지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자신’사이의 간극이 있는 케빈(그는 자신의 양성애 성적지향을 노출하지 않고 여자친구와 섹스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성애 성향을 강조하며, 사람이 없을 때만 샤이런에게 말을 건다)을 조종해 샤이런을 때리게 만든다. 이때 샤이런은 1부에서 케빈이 일러주었듯이, (흑인 남성에게 요구되는) 약하지 않은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진정한 갈등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채이며, 오히려 깊어졌다는 점이 3부에서 밝혀진다.
2부가 끝나는 시점에서 이제 샤이런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길 바라는 사람이 된다. 3부에서 샤이런은 케빈이 불렀던 대로, 강한 사람인 ‘블랙’이 되어있다.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고 종종 어떤 색에도 물들지 않은 색인 흰색 티셔츠를 입던 그는 이제 무채색인 회색, 검은색 옷을 입는다. 블랙은 이전까지의 샤이런의 특징을 거의 갖고있지 않지만, 그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해 후안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샤이런이라는 사실을 관객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블랙-샤이런은 후안과 비슷한 차를 타고, 앞좌석에 왕관을 놓는다. 마약상이 되어서 마약을 팔고 돈도 꽤 잘 번다. 그는 이전까지의 배경이었던 마이애미가 아닌 멀리 떨어진 애틀랜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불면증과 어머니의 악몽에 시달리고 강박적으로 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던 그가 케빈과 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른 사람’이 되어있는 샤이런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1-2-3부로 이어지던 이야기는 1부의 이미지와 다시 연결되며 끝을 맻는다.
“다른 사람이 널 결정하게 두지 마”
블랙은 마지막 장면에서 케빈과 함께함으로서 평화로운 과거의 환상을 본다. 어머니와 케빈과의 재회와 용서를 거친 후이다. 어린 시절 자신과 마주할 때 보는,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는 흑인 아이의 이미지는 다름아닌 후안이 준 것이다. 인간은 관계를 떠나 살수 없으며, 결국 <문라이트>는 아주 여러번 반복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관계는 고통을 유발한다는 것. 그렇지만 동시에 약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관계를 통한 회복과 수용을 통해서만 남들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신-남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분절성과 연속성 모두를 넘어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문라이트의 주제이다.
하지만 <문라이트>가 건드리지 않는 지점들도 있다. 마약상이 생각할수 있는 가장 강한 커리어가 되고 감옥을 갖다오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흑인의 세계, 그 흑인의 세계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고 숨길 수밖에 없는 성적 지향에 대해서 영화는 보여줄 뿐 직접적인 거부와 저항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장애와 폭력을 상징하는 인물들(어머니, 케빈)의 사과로 간접적으로 샤이런의 짐을 덜어주고, 그가 인종적 소수자 흑인도 성적 소수자 게이도 아닌 모두 파랗게 빛나는 새벽의 흑인들 중 하나인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자아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할 뿐이다. 현실과 영화의 흑인은 빈곤에 떠밀려 범죄로 나아가고, 흑인 문화에서 성소수자는 더욱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는 점 역시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니, <문라이트>의 결말이 주는 불안과 불확실성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면 관객은 생각하게 된다. 인권 향상이 역사적으로 인종적 성적 지향에 따른 꼬리표가 아닌 온전한 인간이자 개인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거쳐왔듯 영화를 통해 샤이런을 한 사람의 개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면 희망을 바랄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딱 그정도의 희망과 의문이다. 관람자로서의 관객이 가질수밖에 없는 이런 수동적 태도는 영화가 철저하게 의도한 바로 보인다. 현실감을 의도하는 클로즈업 장면들의 핸드헬드와 뒷모습을 집요하게 쫓아가는 관람자의 시선, 샤이런이 환상을 볼때마다 보이는 관음증적 고속촬영이 그렇다. 결국 영화는 리틀-샤이런-블랙의 이질적인 스팩트럼의 정체성이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여주면서, 지금껏 계속 관찰자였던 관객에게, 영화에서만 던질수 있는 방식으로 물음을 던진다. 마지막 장면의 리틀-샤이런이 스크린을 똑바로 응시하는 이유일 것이다. <문라이트>가, 리틀-샤이런-블랙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