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 잡담: 나는 <어벤져스>시리즈의 팬은 아니다. <어벤져스>를 극장에서 5번 보고, 미국 버전에만 포함된 슈와마 쿠키 장면을 보려고 미군 부대에 초대를 받아 들어갔었지만 이 시리즈를 싫어한다. 과거에 조스 위든의 팬이었고 그가 만든 드라마 <파이퍼플라이>를 여러 번 재주행했다. 그러나 <어벤져스 2>의 첫 장면이 시작하는 순간, 그러니까 블랙 위도우가 자장가로 헐크를 재우는 순간 이 시리즈가 싫어졌다. 농장만 생각하면 손발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난다. <엔드 게임>에도 그 배경으로 농장이 나오는데 뛰쳐나갈 뻔 했다. 블랙 위도우의 과거 설정이 그럴 줄 누가 알았으며, 호크아이가 유부남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따구 반전을 굿아이디어라고 추진한 놈들 아직도 패버리고 싶음. 그 뒤 조스 위든이 저질렀던 불륜이며 어록들이 줄줄이 풀렸고... <아이언 맨 1>을 보고 토니에 이입했던 여자 아이는 잘해봤자 블랙 위도우 정도의 역할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을 보며 자랐고, 마침내 입만 산 미남의 아구창을 날리는 캡틴 마블에 이입하게 되는데....
<어벤져스: 엔드 게임>은 <어벤져스>의 좋은 점만 다시 살려내 만든 것 같은 영화다. 이야기 자체는 썩 말이 되진 않지만 어쨌든 재밌고, 액션은 더 커졌고, 캐릭터들도 골고루 활약한다. 히어로들의 멋진 전투 장면과 <반지의 제왕> 같은 스케일 큰 전투씬도 있다.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서사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다. 이 영화에는 관객들이 <어벤져스>에 기대할 만한 모든 것이 들어있고, 루소 형제는 <윈터 솔저>만큼의 완성도로 이를 그려냈다.
그러나 영화의 밀도는 편차가 있다. 조연들은 도구적으로 소비된다. 가령 배너 박사의 경우 그는 순전히 공학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의 대사와 역할은 설정만 조금 끼워맞춘 다른 캐릭터가 맡아도 전혀 상관이 없다. 배너가 시리즈를 거쳐 이어 오던 지성과 분노, 두 자아간 갈등에서 단절된 그는 초록색 도라에몽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든" 여성 캐릭터의 표현이 이런 기계적인 수준에 머물며, 일관되게 여성 혐오를 표현하고 있다.
(이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건 네뷸라의 캐릭터이다. 네뷸라는 메인 플롯의 한 축을 담당하는 캐릭터로 타노스와 직접적으로 대적하는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갈등을 겪고 선택을 내리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가 내리는 선택과 그 의미는 영화 전체의 메시지와 완전히 반대다.
먼저 투탑 남성 주인공인 토니와 스티브를 보자. 그들은 과거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마지막엔 그들의 노력 자체가 긍정받는다. 먼저 토니는 5년동안 딸을 낳아 키우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안락한 삶을 희생해서 과거에 희생된 사람들을 구하러 나선다. 그 과정에서 평생 컴플렉스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도 만나고, 아버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받아들이고 어른이 된다. 한편 항상 현재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지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스티브는 기회가 주어지자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전과 다른 선택을 내리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해진다.
네뷸라는? 과거의 자신과 적대하고 자신을 죽인다. 과거 네뷸라는 타노스의 가스라이팅에 세뇌당한 상태다. 미래 네뷸라는 과거 가모라와 과거 네뷸라에게 "너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어"라고 설득한다. 과거의 네뷸라는 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래 네뷸라의 손에 죽는다.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은 서로 과거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어서 의지해서 위기를 극복하는데, 네뷸라는 과거의 자신과 갈등하다가 자기 자신을 쏴 죽인다. 하워드 스타크와 토니 스타크, 캡틴 아메리카는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는 이해를 받는데, 과거 네뷸라는 오답 처리되어 완전히 부정된다.
이 대조는 블랙 위도우와 호크아이의 관계, 갈등에서 더 두드러진다. 호크아이는 가족을 잃고 복수심에 미쳐 날뛰었던 자기가 죽어야 한다고 우기는데, 블랙 위도우는 자신도 훨씬 전에 그랬으니 이해한다며 희생한다. 그리고 호크아이는 블랙 위도우를 잃었으니 개심하여 다시 인생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하는데, 이어지는 전투 장면은 <어벤져스>의 블랙 위도우vs헐크 장면의 완전 오마주다. 블랙 위도우가 희생하고, 그녀가 주인공이었던 전투씬을 넘겨받는 대상이 남성 조연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엔드 게임>의 모든 여성 캐릭터는 조력자이며, '적극적으로' 조력자에 머무는 것 처럼 보인다. 블랙 위도우는 소울 스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리고 전작에서 희생되었던 가모라와 마찬가지로 시신이 보여진다. 낭떠러전신을 직접적으로 표현되어(위에서 찍는 풀 바디 샷)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샷이 한번 더 나온다.
이 영화에서 서사가 주어지고, 두 번째 기회를 받는 캐릭터가 모두 남성 캐릭터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전투력 1, 2위는 캡틴 마블과 완다다. 그러나 캡틴 마블은 필살기 정도 역할을 맡을 뿐이고, 그 전까지 어벤저스 인원 모두가 그녀를 빈정거리는 말투로 무시한다. 완다가 복수심에 불타 타노스를 쥐어 짜는 장면은 3분이 될까 말까 하다. 마지막 호크아이와의 대화 장면도 완다 아닌 누구나 들어가도 상관 없는 도구적인 장면일 뿐이다. 너무 강해서 수납이라는 변명은 불가하다. 지난 영화의 비전과 완다의 비중은 훨씬 높았다.
반면 토르를 보자. 그를 위해서는 다양한 액션 장면이 준비되어 있고, 비중도 큰 데다 무기도 하나 더 얻는다. <트레인스포팅>의 12세 관람가 버전으로 술독에 빠졌다 재기하는 스토리도 있다. 토니에게 아내 페퍼가, 스티브에게 여자친구 카터가, 호크아이에게 동료(이상 연인 미만) 블랙 위도우가 있듯 토르에겐 어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토르의 묘사는 다른 측면에서 악의가 넘쳐 고의적이라고밖엔 생각할 수 없다. 항상 상의 탈의 장면이 있을 정도로 아이 캔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아니라 남성적 매력이 넘쳐 작중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히어로로 묘사되었던 그가 어째서인지 산적 수염에 남산만한 술배를 달고 나온다.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안 그래도 남성 배우들이 나이를 먹어 화면이 칙칙한데-어째서 남성 배우들만 이렇게 나이를 빨리 티나게 먹는걸까 이해할 수 없다- 토르마저 크리스 햄스워스인지 피터 잭슨인지 모를 몰골로 나오다니, <토르: 라그나로크>는 장발 토르 짧머 토르 오드아이 토르 안대 토르를 골고루 보여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루소 형제가 너무 밉다. 게다가 성격묘사는 딱 인터넷 커뮤니티 악플러 그 자체로 여성에게 매력 없는 남자 나무 위키 항목을 읽고 캐릭터를 만들었나 싶을 정도다. 그러면서 완다랑 블랙 위도우 코스츔은 그대로 가슴오픈에 완다는 가슴 골 강조되는 각도에서 찍어놨더라? 캡틴 아메리카 엉덩이 30대 버전으로 클로즈업해서 찍어줬어도 요즘 시대에 파워랭킹 2위 히어로 가슴노출로 찍어놓은건 변명이 안 됨.
이상의 이유로 주먹이 울었다. 루소 형제의 여성 혐오는 조스 위든보다 더 질이 나쁜데 조스 위든은 여성 혐오적이고 이상한 캐릭터 롤을 주긴 했어도 그 안에서 캐릭터가 움직이는 방향은 납득 가능했다. 블랙 위도우는 <어벤져스>에서 전형적인 미인 스파이지만 미인 스파이가 할 수 있는 활약을 다 하고 그것도 멋지게 해내서 블랙 위도우의 독립적인 캐릭터가 힘을 얻었다. 결정적인 역할- 배너를 데려오고, 로키의 계획을 알아내고, 셉터를 탈취해서 이동하는 것도 다 블랙 위도우 공이 컸고, 조연이었지만 아이언 맨 등 주연과 마찬가지로 과거사와 가치관, 즉 캐릭터 파악이 가능했다. <어벤져스 2>에서 뜬금없이 자장가를 부르고 과거에 불임시술을 받은 게 트라우마라 고백했어도 그녀가 바튼의 아이들의 고모 역할을 해 주고 바튼과 그의 아내와 잠깐 나눴던 대화는 블랙 위도우의 캐릭터였다. 갑자기 브루스 배너를 짝사랑하고 썸을 탔다고 해도 그들이 갈등 상황에서 나눴던 대화는 배너와 나타샤의 캐릭터상 의미 있고 흥미로웠다.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연인을 만들고 싶어진 블랙 위도우와 회피욕구를 느끼는 배너는 캐릭터적으로 흥마로웠단 말이다. 반면 루소 형제의 블랙 위도우는 항상 결의에 차 있고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심리 묘사는 부재함. 하지만 토니와 스티브에게는 항상 차고 넘칠 정도의 캐릭터 해석과 관계성 대화들이 들어가고, 그들의 관계는 밀도가 장난이 아님. 코믹스 덕후들 즐거워 보이더라.
이번 영화에서 피날레를 장식하는 페퍼와 토니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아이언맨 3>에서 이어지는 서사를 좋아하고, 페퍼가 마지막에 수트를 입고 토니를 구하러 왔을 때 정말 좋았는데 집 오는 길에 되짚어보니 나왔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페퍼는 그냥 토니 급할 때는 떠날 수 있고, 돌아오면 애도 낳아 주고, 전원생활 해주고, 전투력 필요할 땐 수트 입고 지원 와 주고, 죽기 직전에 마음의 위안도 주는 만능 여자친구였기 때문이다. 누가 1998년에 여우주연상 받은 배우 알파걸 여자친구로 처음부터 끝까지 소비하고 손 털죠? 스칼렛 요한슨은 2004년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인데 2020년 블랙 위도우 솔로 무비에서 처음으로 크리스 햄스워스와 같은 출연료를 받는다고 하고. 정 털려서 앞으로 남성 주연 영화는 믿고 거르는 것으로 실천할 예정.
+) 여성 혐오와는 벗어나 쓰지 않았지만 로디의 캐릭터 묘사가 아무것도 없었던 거 할 말을 잃었음. 과거 토니의 선택으로 반신불수가 된 캐릭터가, 잔해에 깔려 수트를 벗고 기어가는 상황까지 나왔는데 활약할 분량을 전혀 주지 않더라. 뭐하자는 건가 싶었음. 정말 백인 남성 파티였고 이후 다시는 대중영화가 이런 형태로 나오지 않았으면 함. 마블은 그동안 <블랙 팬서>와 <캡틴 마블>, <토르: 라그나로크>로 다양성 트랜드 면피하기와 흥행 둘 다 이뤄왔는데 루소 형제가 맡은 시리즈들은 항상 그대로였고 이번엔 더 심했음.
++) 전작보다 확실히 나았던 점: 타노스 분량이 적다. 진지한 악당처럼 묘사됐던 전작에 비해 이번 작에서는 미친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나와선 쉴 새 없이 맞기만 해서 분이 풀렸음. 진지한 대사 할 때마다 화났지만 JYP라고 생각하니까 웃어넘길 만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