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남자애들이 여자 탈의실에 카메리를 설치해 놨다는 소문이 돌았다. 체육 선생님은 지각생들을 엎드려 뻗쳐 시키고 때리면서 치마를 걷어붙인 허벅지 쪽으로 웃곤 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시집도 못갈 년들이라는 말을 일상적인 욕으로 썼다. 윤리 선생님은 매 시간마다 음담패설을 했는데, 신혼 첫날밤 터진 처녀막이 꼭 떡볶이 같았다는 말에 학부모들이 항의했지만 징계를 당하는 일은 없었다. 대학교, 개인 문집을 만들어 1:1면담을 해야 했던 글쓰기 수업에서 여자애들은 "문학 소녀"라 처음엔 글을 잘 쓰는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기만의 세계에 갇여서 사회적인 시각을 갖추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모욕감에 기가 죽었다.
그리고 처음 들어간 사회학 입문 수업에서 페미니즘을 배웠다. 남자 혐오자라는 소문이 돌았던 그 강사님의 수업에서 남자애들은 대개 납득이 가능한 이유로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했다. 반면 나는 수업에 푹 빠졌고, <안토니아스 라인>과 정희진의 저서들, 한국 여성연구소에서 나온 조금의 책들을 읽었다. 이 모든 일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어째서 그렇게 늦게서야 알았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장손인 동생과 노골적인 차별을 받으면서 컸고, 이미 너무나 큰 분노를 겪고 있었다. 차별대우에 대해 따질 때마다 부모님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작은 일에 왜 확대해석을 하냐고 반문했다. 우리 부모님, 남자애들, 체육 선생님, 윤리 선생님, 국어 선생님, 항상 그들에게는 차별이 아니라는 이유가 있었다.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태도로 왜 우리가 차별을 했다고 생각하냐며 억울해했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내가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를 지지하는 이유다.
EIDF에서 세번째로 본 영화 <부르카 복서>는 내가 필요로 했던 페미니스트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다. 강간 뉴스가 매일같이 나오고, 골목에서 강간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일상인 여자애들을 상대로 복싱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그 제자들이 주인공이다. "여자애가" 복싱 따위를 배워서 뭘 하냐고 심지어는 선생님의 아들까지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고, 제자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따라온다. 직업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때로는 자유를 위해.
“두려워하지 말고 똑바로 쳐다보면 맞서 싸울지 도망칠지 결정할 수 있어.”
망나니 1학년이었던 나는 수업마다 지각을 하고 뒷문이 잠겨있는 60명 규모 강의실을 강단에서부터 헤집고 들어갔었다. 선생님은 매번 나에게 면박을 줬고, 출석에 엄한 수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지라 학점은 기대도 않고 있었다. 그래도 공부는 재미있었다. 기말고사에는 페미니즘 문제를 다룬 논술형 문제가 나와서 길게 답변을 써 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수업에서 나는 기념비적인 첫 A를 받았다. 당분간은 마지막 A이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나를 위로해주려 하셨던 분들이 꽤 계셨다. 고등학교, 수업시간마다 잠만 자던 나를 눈여겨보고 공부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 보면 잘 할거라고 설득시켰던 선생님이 계셨다. 중학교, 영어의 ㅇ자도 몰랐던 나를 어르고 달래서 가르쳤던 학원 선생님도 계셨다. 초등학교, 엄마가 읽을 책을 사주지 않는다고 일기장에 썼더니 선생님께서 간직하고 계시던 아름다운 그림들로 가득찬 60권짜리 어린이용 세계문학 전집을 선물로 주셨다.
“선생님은 저를 타슬리마 나스린으로 부르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방글라데시 작가 아세요? 그 작가는 여자들의 삶을 그리고 여자들의 욕망과 꿈을 그렸어요. 타슬리마 나스린은 그런 글을 쓰죠. 그런 글을 써서 세상에 알렸어요. 그걸 보고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죠. 그렇게 변해가는 거죠. 그래서 타슬리마는 방글라데시에서 쫓겨났죠. 자신의 조국에서 살지 못하게 됐어요. 물론 저는 평범한 여자애고 그분은 작가지만요.”
그들 덕분에 나는 아직 살아있고, 이제는 슬퍼하고 무력감에 힘들어하는게 아니라 폭력과 계속해서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대학에서, 책에서, 강단에서 나는 불의와 싸우는 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들여 훈련하더라도 단숨에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옥상에 닿기 위해서는 계단을 하나 하나 밟는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 숙제이고, 동시에 동료들과 함께 올라가는 긴 종주다.
영화는 복싱을 배운 소녀들이 성폭력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영화가 제작될 당시, 인도의 모디 총리가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바로 강간 범죄의 잔혹성이 인도를 부끄럽게 한다”며 “피해자인 여자 보다는 남자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자식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한 것도 이들의 분투가 일궈낸 한 층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 여성도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위해 오랜 싸움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불의와 싸우는 법을 가르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불의가 당연하고 이 모든 일은 어쩔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으려면, 폭력에 맞서 싸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에게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