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영화로만 평가하자면 그저 그랬다. 영화는 아이히만 재판 취재로 시작해서,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을 살인마 괴물이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해 같은 유대인들의 격렬한 혐오와 맞서게 되는 내적 외적 투쟁을 보여준다. 사실 사건이랄게 별로 없으니 영화로서의 재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시놉시스에서부터 드러나고, 한나 아렌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들일만한 내용도 아니니, 이 영화는 처음부터 나같은 아렌트 숭배자들과 덕심을 공유하려 만들지 않았나 싶다.
초반부에서 아렌트는그녀의 글에 대한 변론을 거부한다. 자신의 의도는 모두 글에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비난과 친구들의 절교, 공개적 모욕을 겪은 뒤 마침내 변론, 즉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기 위한 대화에 나서기로 한다. 이런 태세전환은 그녀의 멘토 하이데거의 플래시백 장면들과 대비되어 나타나는데, 하이데거는 개인적인 입장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끊임없이 나치에 협조하는 행보를 보였고 아렌트와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그 뒤 수용소에서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아렌트는 "사유는 고독한 과정이"라는 개인 하이데거와 "자신은 그저 규율에 따랐을 뿐"이라는 개인 아이히만의 입장을 모두 거부한다. 개인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는 오해와 갈등을 필연적인 것으로 방치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물론 공개 변론은 출구가 아니다. 그녀는 친한 친구를 잃고, 오히려 더 큰 사회적 경멸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 모든 결과를 알고 있었어도 여전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을 거라고, 진짜 친구를 찾아내야 했다고 남편에게 말한다.
"온 세상이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 애썼지만, 누구도 내 진짜 실수를 발견해내지 못했어. 악은 평범하면서 동시에 근본적일수 없어. 악은 언제나 극단적이지, 절대 근본적이지 않아. 깊고도 근본적인건 오직 선(善) 뿐이야." 1
그들은 포옹하고, 아렌트가 타자기로 원고를 작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소파에 누운 채 홀로 담배를 피운다. 이는 영화 초반부터 꾸준히 제시되어왔던 아렌트의 습관으로, 극중 하이데거가 "사유란 고독한 과정이야"라고 말했던 그대로 "사유"와 "고독"을 상징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는 최초로 방 밖에서 열려있는 문이 보이도록 그녀를 잡는다.
선과 악의 문제를 논하는 아렌트의 대사에서 내가 근본적(根本的)이라고 번역한 단어 Radical과 극단적(極端的)이라고 번역한 단어 Extreme의 차이도 사실은 이 열린 문에 있다. Radical은 "어떤 것의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부분에 연관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가리킨다. 정치정당의 진보적이거나 극단적인 부분을 지지하거나 정치사회적 변화를 지지하는 것을 뜻하고, 또 앞 각주 부분을 생각하면 재미있게도 병든 조직을 인체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국어로는 일반적으로 급진적, 근본적이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Extreme은 "질적인 변화를 포함하지 않고, 언제나 이항대립적이며, 양적인 의미에서의 상태의 극단"을 뜻한다. "어떤 것의 최고점, 예외적인, 먼" 등을 뜻하는 Extreme은 한국어로는 일반적으로 극도의, 극심한, 극단적인이라고 번역된다 2 3
하나 더. 영화에서 아렌트는 용기있는(Courageous)사람이라고 자주 표현된다. 똑같이 "용기있는"을 뜻하는 단어 Brave가 고통과 어려움에 두려움 없이 맞서는 것을 뜻하고 강한 인간의 승리를 상정하는 반면, Courageous는 어려움에 피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결과에 상관없이 이에 맞서는 인간의 의도적인 선택을 강조한다.
이 쯤에서 블로그 타이틀인 Pale blue dot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촬영한 이 사진에서 지구는 그저 "창백한 푸른 점"으로 보인다. 나는 외롭거나 우울해질 때면 이 사진을 꺼내보는데 광대한 우주에서 고독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 어쩌고 할 것도 없이 산다는것도 머리가 빠개지는 일인데 말 안 통하는 인간들과 끊임없이 무의미한 대화를 나눠가야 할 뿐 아니라 내가 가장 중요하게 고민하는 사회니 자아니 사랑이니 하는 것도 사실은 별 다를 거 없이 다 쪼매난 푸른 점에 불과하다는걸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정말 좋아진다. 나는 태어나 죽을 거고 나를 포함해서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고 어쩌고저쩌고 왓소에버. 이렇게 생각을 전환하고 나면 기왕 태어난 김에 내가 생각하는 최선을 밀어붙이고 적어도 내 생각의 지평을 최대한 넓히고 싶고 쓰고싶은건 다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되......는것까진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
한 마디로 지금 내가 있는 데서 잘 하자는 결심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블로그 타이틀을 '창백한 푸른 점'으로 붙였다. 나는 어차피 아무것도 아니니까 뭐든 해보지 뭐. 그리고 나는 어차피 여기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대로 생각하고, 글로 쓰고, 깨지고 비판받고 부딛치고 조금씩은 배우고 다 해보지 뭐. 그런 낙관적인 자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용기와, 그 결과까지 수용하는 책임감을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블로그는 최대한 내가 읽고 보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기고하는(ㅋㅋ)식으로 쓰고, 주소변경이나 게시물 삭제 없이 꾸준히 운영해볼까 한다.
처음 이 사진에 별칭을 붙인 세이건의 말마따나 우리 스스로가 중요하다는 하잘것 없는 믿음 때문에 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수많은 증오와 오해와 피가 흘렀다. 우리는 보잘것 없는 존재고, 스스로를 파멸시킨다고 해도 도움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더 만나고 어쩌면 이 창백한 푸른 점에서 무언가를 이루는 일부가 될 수 있길 바라게 된다. 마치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이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 조응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고 이 교차점이 나에게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듯 말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이런 자세에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못하게 회답한다. 버스에서 내린 남자는 손전등을 키고 어두운 길을 따라가다 트럭을 타고 나타난 괴한들에게 납치당한다. 남자와 나란하게 그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마지막 숏에서 남자가 떨어트린 손전등이 여전히 바닥을 비추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손전등의 빛 몽타주는 아렌트가 담배에 붙이는 불로 이어지면서, 도시의 전경을 지나쳐 걸어가다 소파에 몸을 누이고 허공을 응시한다.
무한히 작은 입자의 움직임이 우리가 볼 수 있는 태양계와 그 유형상 비슷하며 나아가 인간사회의 삶과 행동과 비슷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그 이유는 우리가, 정밀한 도구를 통해 자각할 수 있다 하더라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인 무한히 작고 무한히 큰 세계로부터 떨어진 만큼이나 인간실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이 사회에서 행동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대학의 저명한 학자들에 대해 통상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불행히도 인간의 어떤 다른 능력도 사유만큼 약하지는 않다. 전제정치에서는 사유하는 것보다 행위하는 것이 훨씬 쉽다. 사람들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사유는 오로지 소수에게만 알려진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아마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이 소수가 우리 시대에 그보다 더 적어지지는 않았다고 믿는 것이 그리 억측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미래 세계에는 중요하지 않거나 제한적으로만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활동적 삶 내의 여러 활동들을 관찰하고 측정하는 데 오직 활동 존재의 경험과 활동성의 정도로만 적용하였다면, 사유가 모든 활동들을 능가한다는 결론을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 사유의 경험을 한 사람은 누구든지 카토(Cato)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을 때 얼마나 옳았던가를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
ㅡ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 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희미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를 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희미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ㅡ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 대사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거의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Good can be radical; evil can never be radical, it can only be extreme, for it possesses neither depth nor any demonic dimension, yet—and this is its horror!—it can spread like a fungus over the surface of the earth and lay waste the entire world.” [본문으로]
- Radical의 정의는 http://dictionary.cambridge.org/dictionary/english/radical, https://en.oxforddictionaries.com/definition/us/radical 참조 [본문으로]
- Extreme의 정의는 https://en.oxforddictionaries.com/definition/us/extreme, http://dictionary.cambridge.org/dictionary/english/extreme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