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둘 다 통상적 이해를 뛰어넘는 외부세계에 대한 매료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매혹은 대게 어떤 불안이나 어쩌면 두려움까지 아우르지만,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이 반드시 무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기이한 것은 불규칙한 배열, 형언할 수 없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 개념으로 포섭할 수 없는 낯선 것 등으로 외부 세계와 난데없이 연결되고 시간이 무한 순환하는 등의, (제가 처음에 이해하기로는) 미스터리 개념과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설명을 요구하지만 적절한 설명이나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으스스한 것이 미스터리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으스스한 것은 부재의 오류와 존재의 오류ㅡ즉 부적절함, 있어야 할 곳에 없는것, 없어야 할 곳에 있는 것 등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마크 피셔는 으스스한 것이 미스터리라고 분명히 말해요. "모든 수수께끼가 으스스한 것을 야기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 두자. 여기에는 또한 이질성, 즉 해당 수수께끼에 보편적인 경험을 뛰어넘는 지식, 주관성, 감각이 수반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이해, 인지, 인식을 넘어서는 다른 질서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있는데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때, 불가사의의 감각, 그건 으스스한 것입니다.
("어떤 일이, 왜 벌어졌는가?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 의미나 의도를 분석할 수 없는 구조물들은 또 다른 부류의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스톤헨지에 놓여 있는 환상열석이나 이스터 섬의 석상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또 다른 의문들에 직면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 구조물들을 창조한 이들이 왜 사라졌는지가 아니라─여기에는 수수께끼가 존재하지 않는다─사라진 무엇의 본질이다. 어떤 존재가 이 구조물들을 창조했을까? 우리와 어느 정도 유사했으며 어느 정도나 이질적이었을까? 이런 존재가 속한 상징적 체계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들이 세운 이런 기념물은 그 상징 체계 내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왜냐하면 이런 기념물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상징적 구조물들은 쇠퇴했으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여기서 목격하는 바는 실재하는 것 그 자체의 난해함과 불가사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기이한 것을 으스스한 것과 구분해 보자면, "기이한 것은 존재─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구성된다. 기이한 것은 어떤 경우(러브크래프트가 집착했던 경우들) 터무니없이 과도한 존재, 형용할 수 없이 우글거리는 것으로 특징 지어진다." 그럼 기이한 것의 핵심은 '부적절함'이겠네요. 미장아빔같은 인과관계의 허물어짐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요.
『맥베스』에 나오는 예언하는 마녀들은 결국 ‘기이한 자매들’로 알려지는데, ‘기이하다’의 옛 의미 중 하나는 ‘운명’이다. 운명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시간과 인과의 뒤틀린 형태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기이하다. 하지만 힘에 대한 질문, 즉 누가 혹은 무엇이 운명을 엮어내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으스스하기도 하다. 으스스한 것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질문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들과 관계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때에 여기 어째서 무언가 있는가? 무언가 있어야 하는 때에 어째서 여기 아무것도 없는가? 죽은 자의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 기억상실증 환자의 당혹스러운 눈─이런 것들은 버려진 마을 혹은 환상열석이 그러하듯 으스스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기이하다의 옛 의미가 '운명'인 건, 운명이 인간의 인지와 인과관계적 추론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처음 계획은 성격과 운명에 대한 사유를 언급하면서(대충 성격은 그 사람이 내리는 행동을 결정하고, 과거를 돌려도 성격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는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면 성격이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기이한 것은 정말로 내적인 것과 긴밀하다는 이야기를 쓰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쓰기 위해 검색해 보니 벤야민은 <운명과 성격>이라는 글에서 니체의 성격과 운명에 대한 사유를 비판하면서 성격은 자연적인 것이며 희극에서 드러난다고 썼다더라고요. 요약문에서 인용하자면 "성격은 오히려 자연과 연관되어 나타납니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에서 운명을 사유했다면, 벤야민은 희극에 관심을 둡니다. 인간의 성격은 희극에서 나타납니다. 희극 무대에서 비로소 인간의 행동은 도덕적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고도의 명랑함의 대상이 됩니다. 무대 위 인물의 행동은 관중에게 도적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성격을 보여주는 한에서만 관심을 끕니다."
또한 <초현실주의>에서 벤야민은 당대의 초현실주의자들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은 이미지공간을 통해서 "일상적인 것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꿰뚫어볼 수 없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시각의 힘"을 갖고 있다고, 이들이 범속한 각성을 이뤘다고 평가합니다.
이 내용들을 읽으니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예술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시각의 전환, 각성, 다르게 보게 한다는 점에서 벤야민적인 각성의 도구라는 생각이 드네요. (A님의 감상에 감사드리면서...) 또 특히 도덕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장르라는 건 제가 괴담에 매료되어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 또 벤야민은 인류와 혁명을 위해서 이런 각성을 습관으로 들여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지금 감상을 공유하는 것도 작은 혁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