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주 우연히, 좀처럼 배달음식을 시켜먹지 않는 우리 집에서, 그것도 8시가 넘은 시간이면 엄격하게 나의 절식을 권고하는 엄마가, 순전히 요즘 본인이 보드람치킨에 꽂힌 바람에.... 잠깐 거실 TV로 뭘 볼까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그리고 또 나는 뭘 볼지 고민하는 시간을 굉장히 아까워하는 편이라 항상 위시리스트를 꽉꽉 채워놓는 편인데 스트리밍 플랫폼 중 왓챠는 다인 계정에 얻어 타고 있고 이 계정에는 내가 '보고 싶어요'로 지정한 영화나 프로그램이 별로 없어서 나는 드물게 무작정 카테고리를 뒤적거렸고 정말 정말 어쩌다가 영화관에서만 7번 넘게 본 <라라랜드>를 틀게 되는데...
여기까지만 해도 한 5개정도의 우연이 겹친 셈인데 이렇게 해서 오늘이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1. 나는 <라라랜드>가 수미상관 구조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첫 장면에서 단역들이 덧없는 과거와 꿈꾸는 미래를 노래하는 고가도로, 미아와 세바스찬은 그곳에서 교통체증을 겪다 서로에게 뻐큐를 교환하는 첫 만남을 가진다. 그리고 피날레에서 배우가 된 미아 역시 교통체증으로 인해 예약했던 저녁 정찬을 버리고 발길 닿는 대로 산책하다 세바스찬의 클럽에 들어서게 된다.
2. 세바스찬의 꿈은 처음부터 정통 재즈 클럽을 차리는 것이었다. 세바스찬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첫 씬에서 그는 "언젠가는 내 클럽을 차리고 말" 거라며 누나에게 그의 재즈 영웅이 앉았던 의자에 앉지 말라곤 불평한다. 그리고는 부엌의 바 자리에 그 의자를 올려놓는데... 결말부에서 그 의자는 그가 차린 클럽에서 장식대에 '올려져' 있는 것으로 잠깐 지나간다.
3. 세바스찬의 상상 속 미아와 함께하는 버전의 세바스찬은 블루-감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는데, 그 환상에서 미아는 붉은 계열의 옷을 입어 둘은 보색효과을 이루며 어울린다. (현실에서는 미아의 남편이 감색 양복을 입고 있으며, 미아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재즈 피아노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현실의 세바스찬은 갈색-모래색에 가까운 옷으로 그들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환상이 말미에 이르는 장면에서 세바스찬과 미아는 (감정이 빠진) 흑백톤의 옷을 입고 춤을 추다가 고전 흑백 필름을 재생하는 것으로 그들이 꾸린 가정에 대한 상상을 이어나가지만, 브라운관에서 재생되는 것은 오히려 컬러필름 초기의 붉은색과 남색이 강조되는 환상이다.
이런 사실들을 나는 엄마가 말하지 않았다면 모를 뻔했는데 왜냐하면 나는 <라라랜드>를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 기억이 옳고 엄마가 하는 말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엄마가 말했던 대로 세바스찬이 원래 원했던 건 재즈클럽을 차리는 것이었다(따라서 미아뿐 아니라 세바스찬도 꿈을 이뤘다. 아무도 희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무의식 중에 미아가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이 사랑 없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결혼이었다면 미아가 차가 막힌다며 저녁은 캔슬하자고 했을 때 흔쾌히 핸들을 돌리지도 않았을 거고, 길을 걷다가 충동적으로 지하의 재즈바에 들어가 자리를 잡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를 일곱번이나 보면서 둘의 사랑에 과몰입한 나는 (미아가 세바스찬과 미아의) 사랑을 포기했다면 (미아는) 다른 사랑을 기대해서는 안되고, 미아가 꿈을 이뤘다면 (더구나 이를 위해 세바스찬이 희생했다면) 세바스찬은 꿈을 이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다. 양자택일도 아니고, 하나를 이루기 위해 뭘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를 제물로 바쳤다고 뭐가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미아의 결혼생활도 만족스러워 보이고, 세바스찬도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는 것처럼 둘은 그저 독립적인 각자의 삶을 일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엄마도 "둘이 같이 파리를 갔다거나, 결혼했다거나 했어도 웬만큼 잘 살았을 텐데 말이야. 서로 저만큼 이뤄낼 수 있는 사람인 게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결국 해냈을 것 같은데..."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러게. 근데 밖에서 봤을 땐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거 같아도 또 다른 게 인생의 묘한 맛 아니겠어." 라고 했다.
환상과 현실에서 세바스찬이 미아와 함께 할 때, 그는 항상 블루 계열 옷을 입고 있었다. 마지막 씬의 현실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는 때처럼 샌드 베이지 계열의 옷을 입는 장면은 딱 하나, 다른 남자와의 데이트를 뛰쳐나온 미아가 세바스찬과 "나란히" 영화를 보는 장면이다. 서로의 꿈을 우선시하는 두 개인이 고유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 "같이 앞을 보는" 장면이, 그들이 함께하기로 결심했던 장면인 것이다.
서로의 1순위가 꿈인 관계는 (설령 보이는 결과가 달라지지 않더라도) 1순위가 관계인 관계와 전혀 다르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헤어질 수 있는 관계 또한 그 나름의 멋과 맛이 있는 거고, 세바스찬의 상상은 '만약 내 1순위가 관계였더라면'의, 돌아가더라도 가지 않을 길이기 때문에 더 애틋하지 않았을까. 둘의 관계와 공감대는 꿈을 우선했던 것이었기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헤어졌더라도 서로 변하지 않았다는 걸 발견하고 서로 사랑을 담아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
다름과 오해는 다른 풍경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 다름을 주의 깊게 살펴볼 기회가 온다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나 또한 엄마의 시각적 기억력 덕분에 오늘에 와서야 <라라랜드>가 수미상관 구조를 이룬다는 사실도 처음 발견한 것이다. 나는 시각적 디테일에 둔감해서 평생 모를 수도 있었던 사실인데 말이다. 우리는 옥신각신하다가(사실은 내가 우기다가) 내가 영화에는 범죄처럼 여기는 빨리 감기를 해서 이 이야기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을 찾아냈는데 내가 원래대로 영화를 감상했더라면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영화를 너무 사랑하고 그런 나에게 미아와 세바스찬의 사랑은 유일무이하고 엄청나서 그 큰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다면 그만큼 뭔가 중요한 걸 희생해야만 하는 게 정당한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하지만 설령 유일무이하고 엄청난 사랑일지라도 그런 인과응보의 카르마에서 자유롭다는 것, 그게 진정 사랑의 좋은 점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아처먹은 과거의 사랑에 대해서도 기꺼이 아름답게 추억한다. 만에 하나 돌아갈 수 있다면, 설령 실수라도 피하지 않고 다시 한번 어리석어지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