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영화평론가: "<군함도> 영화비평 - 수평에서 수직으로 운동과 활력"
송경원 영화평론가: "<군함도>와 <택시운전사>,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들의 한계와 우려에 관하여"
번역의 계기가 되어준 글들
<군함도>는 역사적 장소에 과감한 픽션을 도입하여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택시운전사>는 역사적 문제에 대한 재현과 보도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뤘다. 이 주제를 흥미롭다고 생각하던 와중 씨네 21에서 <군함도>와 <택시운전사>에 대해 비평을 게재해주어 유익한 공부가 되었다. 하나 어려운게 있었다면 영화의 재현 문제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텍스트라고 계속 인용되는 <천함에 대하여 De l'Abjection>를 한국어 웹상에서 읽을 수 없어, 영문 텍스트를 찾아야 했다.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던 중, 이번 기회에 영화와 재현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해 공부 겸 번역해 보았다. jaques-rivertte.com의 영어 번역문을 사용했으며, 비영리적인 공부의 목적으로 번역했음을 밝힌다.
<On Abjection>, Jacques Rivette
<천박함에 대하여>, 자크 리베트
(또는 천함에 대하여)
French to English translation: David Phelps
with the assistance of Jeremi Szaniawski
영한번역: Wendy Lee (http://jewhalewhile.tistory.com)
with the assistance of her dear friend M
(jaques-rivertte.com의 영어 번역문을 사용 / 공부 목적으로 번역 / 오역 의역 다수)
유대인 강제수용소 같은 주제에 대해 영화를 찍기로 했다면, 감독은 단지 그 주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영화를 찍기에 앞서 여러가지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리멸렬함, 어리석음, 소심함 때문에 <카포>의 콘테코르보 감독은 이 사전 준비를 아주 단호한 태도로 무시해버린 것 같다.
예를 들어 사실주의(realism)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실주의 전반은 물론이고, 영화라는 영역에 한정해서도 사실주의는 불가능하다.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사실주의적 작업은 필연적으로 성취 불가능하며(따라서 도덕적이지 못하다), 현실을 재현하는 것, 마음 아프고 그로테스크한 구성을 자아내는 것, "스펙터클"에 접근하는 전통적 연출법들은 모두 관음증과 포르노의 영역에 속한다. 감독은 "현실감"을 자아내도록 무미건조한 연출법을 사용해야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감히 "현실"을 관객이 견딜만한 수준으로 축소해 버린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힘들어하고, 독일군을 야만인이라 욕할진 몰라도, 결국 완전히 견딜 수 없는 일까지는 아니었다고 무의식중에 단정해 버리는 수밖에 없다. 오직 인내심과 눈치를 겸비한 현명한 관객만이 이런 결론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모든 현대인들은 무의식중에 두려움에 익숙해졌고, 두려움은 조금씩 도덕률의 일부가 되었을 뿐 아니라 현대인의 정신적 풍경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다음엔 어떤 영화가 나를 불쾌하게 할까? 다음엔 누가 나를 놀라게 하고, 또 무엇이 나에게 충격을 줄까?
같은 이유에서 알랭 레네 감독의 <밤과 안개>가 갖는 힘도 기록보다는 몽타주에서 온다고 이해할 수 있다. 몽타주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명료한 의식작용과 같아서,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객관적인 태도로 잔학무도한 실제 사실들을 응시하게 하고, 일어나버린 사건을 손쉽게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설령 끔찍한 관련 자료를 레네보다 더 많이 접한 사람이 있고, 그가 <밤과 안개>를 본다 한들, 익숙하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밤과 낮>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영화다. 요는, 감독은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결정하지만, 그 '무엇'은 감독이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지 결정하면서 결정된다. 1
또 다른 것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뤽 물레가 계속해서, 좌파적인 입장과 우파적인 입장을 막론하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자주 인용했듯이, 도덕률은 트래킹 숏(tracking shot)의 문제다. 또는 고다르식으로 표현하자면, 트래킹 숏은 도덕률의 문제다. 따라서 누군가 <카포>의 트래킹 숏을 형식주의의 극치로 보았다면, 그는 그 트래킹 숏의 "테러리스트" 적 과도함도 비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카포>에서 리바가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숏을 보자. 이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감독은 이동차(dolly)에 카메라를 싣고 밑에서부터 수직으로 틸트업하여 그녀의 몸을 찍기로 했고, 아주 정밀하게 신경을 써서 그녀의 손을 마지막 프레임에 담아내기까지 한다. 이 몇 달 동안 대중들은 사실주의와 판타지, 스크립트와 미장센, 지도를 받은 연기와 자유 연기, 형식이나 내용 같은 엉뚱한 문제에 대해 이분법적인 대립에 갇힌 시야로 계속해서 따져대기만 했다. 사실, 우리가 "모든 주제는 법 앞에서 자유롭고 동등하다"고 할 때, 여기서 정말 우리가 법 앞에서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주제에 대한 감독의 관점", 즉 구체적으로는 그가 주제에 대해 어떤 어조로 말하고, 어느 부분을 강조하는지 같은 미묘하게 차이 나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감독이 찍는 영화를 보는 견해와 태도, 나아가 세계와 만물을 보는 감독의 관점은 대단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감독은 시나리오에 쓰일 사건을 고르거나 줄거리를 만들거나 대본을 쓰거나 배우의 연기를 지도하는 매 순간 자신의 관점을 의도적으로 반영하거나, 일어난 사건을 그저 순수하고 간단히,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으며, 가리지 않고 똑같이" 기술하려는 것으로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2 세상에는 두려움과 동요와 함께 고통스럽게 제시되어야 할 요소들이 있으며, 죽음이 그렇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어떤 것에 대해 영화를 찍으면서 사기꾼처럼 느끼지 않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어떤 이유에서건 그가 영화로 찍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게 좋을 텐데도 전혀 질문하지 않는 것, 바로 이 부분에서 폰테코르보와 그의 동류들의 능력 부족이 드러난다. 3
같은 원리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고 동시에 어떤 편견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대상에 대한 묘사와 대상에 대한 편견은 서로 너무나 밀착해 있어 떼어놓을 수 없는 한 쌍과 같다. 감독은 결코 완벽한 미장센을 만들 수 없고, 완벽한 미장센이 존재할 수 없는 영화(cinema)는 따라서 언어(language)가 될 수 없다.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 관계가 상호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슬프게도 <지하철의 소녀Zazie dans le Metro>의 쟈지(Zazie)만이 이단적인 성취 비슷한 것을 이룰 뿐이다. 촬영 기법에 대한 접근은 분석(analysis)으로 통일성을, 부가(addition)로 종합성을 대체해가며 발전해왔다. 이 접근은 우리를 즉각 이미지 수사학의 문제로 돌아가게 하지만, 촬영 기법과 시각적 수사학은 산업 디자인이 회화와 맺는 관계 수준에 머물고 있다. 어째서 이런 수사학이 자칭 "좌파 평론가"들에게 그토록 소중하게 남아있는 걸까? 결국 부끄러운 줄 모르고 거들 먹거리며 남을 가르치길 좋아하는 것이 그들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푸도프킨, 데 시카, 와일러, 리차니, 그리고 고등 영화 학원(IDHEC, Institut des hautes études cinématographiques)의 고대 전투원들에게 항상 반감을 품어 왔듯이, 이는 폰테코브로가 스스로 "형식주의"라고 칭한 것의 논리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일간지 기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간에, 영화사에서 혁명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해변의 잔물결이 심해의 평화를 깨트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셉 로시같은 숙련공은 뉴욕의 아방가르드에 방해받지 않는다. 왜일까?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상투적인 질문 외에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영화를 찍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영화를 통해 완전히 시대에 앞서가는 답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 그랬던 사람들도 후로는 답보 상태에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를 만들어낸 사람들, 소위 "예술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레네는 그가 이 주에 내놓은 영화가 관객의 관심을 끌더라도, 안토니오니에 비하면 자신은 완전히 아마추어같이 느껴질 뿐이라고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트뤼포는 르누아르에 대해, 고다르는 로셀리니에게, 드미는 비스콘티에게 똑같은 고백을 서슴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잔이 그의 시대에는 수많은 평론가와 기자를 거느렸지만 마침내 화가들의 일원이 되었듯이, 영화 제작자들과 씨네 아티스트들도 미조구치 4나 무르나우 5의 역사에 더해질 것이다……. 6
- 강조는 옮긴이 [본문으로]
- 옮긴이 주: 리베트는 여기서 수필가 장 폴랑의 용어를 빌리고 있는데, "테러리스트"는 언어의 역사성이나 체계성에 따른 상투적인 표현, 형식을 문학과 언어에서 배제하고자 했던 문필가들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역사나 체계에서 분리될 수도 없지만, 역사나 체계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발화 상황과 주체에 따라 우발적으로 구성되는 수행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 말라르메의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기하지 못하리라"에서 인용. 전체 문장은 "그것은/더 나쁜/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으며/가리지 않고 똑같이" [본문으로]
- 셜리 클라크의 다큐멘터리 의 촬영감독. 영화에서는 벽에 기대어 클라크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리베트를 볼 수 있다. [본문으로]
- 옮긴이 주: 미조구치 겐지(1898. 5. 16 - 1956. 8. 24)는 일본 고전주의 영화의 거장으로 컷이 5분 이상을 넘는 롱테이크를 사용해서 인물의 감정에 접근하는 방식을 추구하는 '미조구치 스타일'을 확립. 대표작은 <산쇼다유>. [본문으로]</산쇼다유>
- 옮긴이 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1889. 12. 28 - 1931. 03. 11)는 영화 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최초로 카메라를 등장인물의 감정상태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도구로 사용. 대표작은 <노스페라투>. [본문으로]</노스페라투>